또 한 해가 이렇게 시작된다

겨울 남산을 걷는 이유는 차갑고 맑은 공기에 반해서다

by 현월안




한 해가 시작되면 우리 크루의 시간표는 숨을 고를 틈이 없다. 철학서 토론 모임의 올해 일정표는 어김없이 빡빡하게 채워져 있다. 매번 만나는 장소는 남산 밑에 자리한 출판사의 사무실이다. 그곳에는 우리 크루의 일원인 책 보다 먼저 사람을 품는 여자 사장님이 우리를 따뜻하게 품는다. 넉넉한 인심과 느린 말투,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내어주는 따뜻한 인심과 그녀만이 가진 특유의 여유가 일품이다. 우리 크루는 매번 그녀에게 마음의 빚을 진다. 철학의 공통된 과제를 가지고 모이지만, 그 공간에서는 철학 이전의 신뢰와 인간의 정을 배운다.



우리 크루의 만남은 한 달에 두 번이고 그리고 만날 땐 일찍 시작을 해서 늦은 저녁까지 하루를 길게 꼬박 쓴다. 그래서 운동 겸 기분전환 겸해서 출판사 주변에 있는 남산을 점심을 먹기 전, 꼭 한 시간 정도는 남산을 오르고 그 아름다움에 취한다. 잘 포장된 도로를 따라 한 시간 남짓, 크루 사람들과 함께 걷는다. 빠르지 않은 걸음, 누군가는 말을 하고 누군가는 조용하지만, 발걸음만큼은 같은 리듬으로 맞춰진다. 남산의 사계는 참 귀하게 예쁘고 언제나 다른 모습이다. 계절이 같아도 표정은 매번 새롭다. 나뭇잎을 내려놓은 나뭇가지들 사이로 스며드는 겨울 햇빛과 바람의 온도와 공기의 밀도까지도 그날의 마음을 닮는다.



겨울 남산을 걷는 이유는 차갑고 맑은 공기에 정신을 씻고 싶어서다. 세수를 하듯, 정신에도 세수가 있다면 그 건 남산이면 충분하다. 숨을 깊게 들이마실수록 생각의 흐림이 걷히고, 내쉬는 숨마다 지난 소음이 빠져나간다. 남산은 바라봄과 버팀의 자리에 서 있는 산 같다. 높지 않지만 얕지 않고, 험하지 않지만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간혹 모습을 드러내는 바위들은 거칠지만 그 단단함이 걷는 이를 곧게 세운다. 남산을 걷다 보면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은 부드러움이 아니라, 오래 버티는 힘이라고.



정상에 올라 사람들을 본다. 희고 풍성한 입김을 뿜으며 서 있는 얼굴들. 연인도 있고, 혼자인 사람도 있고, 아이의 손을 꼭 잡은 부모도 있다. 그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남산에 올랐을 것이다. 누군가는 결심을 확인하러, 누군가는 마음을 내려놓으러, 누군가는 그저 걷고 싶어서. 그럼에도 잠깐, 비슷한 표정이 스친다. 오늘을 다시 시작해도 되겠다는 표정이다. 산 아래에는 각자의 겨울이 있다. 누구에게는 생계의 겨울, 누구에게는 관계의 겨울, 누구에게는 마음의 겨울. 하지만 잠시, 모두가 같은 계절을 공유한다.



추위로 언 몸을 끌고 모두 남산 아래 칼국수집으로 들어갔다. 김이 오르는 음식 앞에서 잠깐 숨을 고른다. 첫 모금이 맑고 뜨겁게 목을 지난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서로가 같은 맛을 느끼고 있음을 안다. 칼국수를 깨끗이 비우고 나면 배 안쪽에서부터 말로 다 못 할 꼿꼿한 힘이 조용히 올라온다. 겨울 남산에서 받은 기운이 음식의 온기를 타고 몸에 자리한다. 철학은 이처럼 멀리 있지 않다. 한 그릇의 국물, 함께 비운 시간, 아무 말 없는 공감 속에 숨어 있다.



점심을 마치고 우리는 다시 테이블에 둘러앉는다. 오후의 철학서 토론이 시작된다. 책 속의 문장들은 오전의 남산을 통과해 우리에게 도착한다. 문장 하나를 읽을 때마다, 바람과 바위와 입김이 함께 따라온다. 그래서 토론은 날카롭되 차갑지 않고, 깊지만 무겁지 않다. 서로의 생각을 반박하면서도 지키는 것이 있다. 상대를 이기기보다 함께 이해하려는 온기. 철학은 언제나 관계를 잘 이어주는 연결이다.



우리 크루의 사람들은 모두가 조용하다. 그리고 누군가 말을 잃을 때 기다려 주는 것, 의견이 다를 때도 끝까지 들어주는 여유까지, 모두가 생각을 나눌 줄 아는 사람들이다. 철학은 삶을 설명하기보다 삶을 견디게 하는 힘이라는 것을 모두는 안다. 남산을 오르며 배운 버팀의 자세로, 서로의 시간을 지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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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는 이렇게 시작된다. 일정표는 여전히 빡빡하고, 세상은 쉽게 느슨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안다. 정신이 흐려질 때, 마음이 먼지로 덮일 때, 다시 남산 언저리에서 새롭게 다잡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우리 크루는 또 시작해도 된다는 의미를 진심으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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