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끝에서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본다
시간은 늘 그렇듯 약속을 어기지 않는다. 붙잡아 두려 해도 잠시 미뤄 두고 싶어도, 시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앞으로만 흐른다. 그렇게 또 한 해의 마지막이 다가왔다. 남은 날들은 마치 오래 고개 숙여 배웅하는 것처럼 조용히 저물 준비를 한다. 흔히 이 무렵이 되면 다사다난했던 한 해라는 말을 꺼낸다. 그 말속에는 고단함과 후회와 감사가 뒤섞여 있다. 말 한마디로 정리하기에는 너무 많은 삶의 깊이가 겹겹이 쌓여 있는 시간이다.
돌이켜보면 올 한 해 참 많은 일들과 마주했다.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길을 바꿔야 했고,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 앞에서 여러 번 숨을 고르기도 했다. 그때는 묵묵히 견디는 쪽을 택했고, 또 조용히 애써 웃으며 넘어갔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쏟았고, 얼마나 많은 것을 내려놓았을까 싶다. 무엇을 얻기 위해 그렇게 애를 썼으며, 그 속에서 또 얼마나 행복했는지 나에게 묻게 된다.
요즘 '별일 없으시죠?'라고 묻기도 조심스러운 시대를 살고 있다. 모두가 선뜻 대답하기는 어려운 말이다. 종종 행복을 멀리 있는 목적지처럼 여기며 달려간다. 더 빨리 도착해야 하고, 남들보다 먼저 손에 쥐어야 안심이 되는 것처럼 어디론가 내 달린다. 뭐든 빠른 세상에서 행복을 경쟁이라도 하듯 말이다. 빨리 얻어야 하고 또다시 새로운 걸 향해 기웃거린다.
뭔가를 쫓기며 정작 행복이 머무는 자리를 비워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미 곁에 있는 것을 못 보고, 아직 오지 않은 것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행복은 어쩌면 슬쩍 뒤돌아 서 있을지도 모른다.
한 해를 마무리할 때마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말이 생각난다. '사람은 타인에게 어떤 존재로 살아왔는가에 따라 자신의 행복이 결정된다'는 그의 말은, 삶을 살아갈수록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곁에 있는 이들에게 기쁨이 되려 했던 순간은 시간이 지나도 마음에 온기를 남기지만, 반대로 생채기를 남긴 기억은 아무리 외면해도 마음 한편을 서늘하게 한다.
무슨 일이든 나의 만족에 달려 있다. 남들보다 더 나은 자리에 서야만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끝없는 비교다. 누구에게나 한두 가지쯤은 빛나는 것을 가지고 있지만, 열 가지 모두를 남보다 앞설 수는 없다. 지금의 자리에 머물며 주변과 더불어 충분히 힘껏 살아냈다는 사실 만으로도 이미 만족이다.
어쩌면 행복 속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시간이 지나 추억이 된 뒤에야 그때가 좋았지라고 말한다. 그러나 삶은 가족과 오늘 저녁을 나눈 식탁과 무사히 지나온 하루, 누군가에게 묻는 안부 속에도 작은 행복이 숨 쉬고 있다. 그 순간을 알아보고 감사하는 마음이 사실 행복이다.
한 해의 끝에서 조심스레 돌아본다. 무심한 말로 마음에 생채기를 낸 이는 없었는지, 바쁘다는 이유로 외면한 얼굴은 없었는지. 돌이킬 수 없는 시간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지만, 마음만큼은 정리를 해야 한다. 미안함은 미안함대로, 고마움은 고마움대로 품에 안고 다음 해를 맞이해야 한다. 그것이 저무는 해가 인간에게 남기는 마지막 예의일 것이다.
~~~~~---==~---ㄴ
한 해가 저문다. 아쉬움이 없는 이별은 없겠지만, 사랑 속에서 또 관계 속에서 배운 것들이 조금은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행복은 가까운 사람의 손을 놓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걸 바탕으로 또 조용히 다음 해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