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기억의 맛

삶을 위로하는 음식

by 현월안




가족들과 순천을 여행 중이라는 지인이 순천 지역에서 만든 청국장을 보내왔다. 택배 상자를 열어보았더니 너무 많은 양이라서 놀랐다. 윤기가 흐르고 황금빛 콩알들이 어찌나 고운지, 음식이라기보다 시간의 결정처럼 보였다. 저녁을 준비하며 망설임 없이 그 청국장을 냄비에 풀었다. 불이 오르고 시간이 흐르자 구수한 냄새가 집 안 가득히 퍼진다.



유년 시절, 할머니가 계시던 때에 청국장은 정성이 들어간 특별식이었다. 하루를 제법 성실하게 보냈다고 느껴질 때, 몸과 마음이 동시에 고단해질 무렵에야 식탁에 오르던 별미였다. 그날의 노고를 정직하게 위로해 주는 음식이었다. 청국장이 끓는 동안 시간을 더듬어 본다.



그 옛날 종갓집 친정마당에는 정오의 해가 서서히 기울며 마당에 긴 그림자를 만들 때까지, 할머니는 마루에 앉아 꼬물꼬물 콩을 골랐다. 흠집 난 콩, 덜 여문 콩을 가려내며 손끝으로 계절을 읽었을 그 모습이 겹쳐진다. 콩을 삶는 날이면 가마솥 앞에는 늘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푹 익은 콩을 담아두고는 검은 천을 덮어 두었다. 할머니는 덮어 놓은 것을 들춰 김이 오르는지, 실이 잘 오르는지 들여다보며 정성을 들이셨다. 콩이 발효되며 집 안 가득 쿰쿰한 냄새가 집안 가득 퍼졌다.



청국장이 적당히 익어가면 가을과 겨울 사이, 바람이 차가워질 즈음이면 우리 형제들은 할머니 곁에 옹기종기 앉아 절구에 청국장을 찧었다. 조심스럽게, 그리고 즐겁게. 연신 '맛있겠다'를 외치며 과장된 몸짓을 보이면, 할머니는 말없이 희미한 웃음을 흘리셨다. 그 웃음에는 재촉하지 않는 느긋함이 함께 사랑이 들어 있었다.



청국장을 끓여서 한 숟갈을 떠 호호 불어 입에 넣으면 어찌나 맛이 있던지. 정확한 계량도 없이, 레시피 한 줄 없이 할머니는 어떻게 그 깊은 맛을 만들어냈을까. 그것은 적당히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이만하면 됐다'라고 말할 수 있는 감각. 그것은 수치로 환산할 수 없는 감각이며, 기다림이고 적절하게 시간과 손맛이 가질 수 있는 기술이다. 할머니의 어머니, 또 그 어머니,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먼 조상들로부터 전해 내려온 지혜와 정성이 그 맛에 이어져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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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청국장은 기억 속에만 있고 그것은 이제 그리움이 되었다. 지인이 여행 중에 보내준 청국장 때문에 할머니의 기억이 불현듯 스치고 순창 청국장은 할머니의 기억만큼 정말 맛있었다. 남은 것은 냉동실에 소분해서 얼려 두었다. 청국장은 기억의 음식이고 내 기억에 아직 남아 있다. 삶은 늘 빠르게 흐르지만 기억은 은은하고 적당한 철학을 내게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