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멀리서 봄이 오고 있다
오늘 입춘이다. 달력 위에 적힌 하나의 날짜로만 보면 무심히 지나칠 수도 있는 날이지만, 입춘은 시간의 의미를 가진 절기다. 계절이 바뀌고 보이지 않는 경계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우주의 숨결이 달라지는 순간이다. 겨울의 기운이 물러나고 봄의 기운이 첫 발을 들이는 때, 여전히 두꺼운 외투를 입고 있으면서도 이미 다른 계절의 시간을 살기 시작한다.
입춘을 기점으로 기운이 전환된다고 믿어온 이유도 그 미묘한 순간성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늘 변화를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확인하려 하지만, 중요한 변화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먼저 시작된다. 땅속에서 움트는 뿌리처럼, 얼음 아래에서 흐르기 시작하는 물처럼 말이다.
그래서 입춘에는 '입춘대길 건양다경'이라는 여덟 글자는 서로 건네고, 계절과 삶을 향한 인간의 오래된 의식 같은 의미를 품는다. 봄이 시작되니 크게 길하길 바란다는 말속에는, 지난 계절을 무사히 견뎌낸 것에 대한 위로가 담겨 있고, 따스한 볕이 들어 경사가 많기를 바란다는 말속에는 앞으로의 날들에 대한 조심스러운 희망이 깃들어 있다.
그 옛날 할아버지는 그 글귀를 대문에 붙이며 집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과 빛과 사람과 시간을 함께 다독였다. 바깥세상과 맞닿아 있는 대문은 조심스러움의 상징이었다. 외부의 찬 기운은 막아내고, 좋은 기운은 기꺼이 들이겠다는 마음이다. 입춘에 입춘첩을 붙이는 것은 복과 볕이 넉넉히 들어오기를 바라는 지혜였을 것이다.
시간은 참 빠르게 흐른다. 아직 공기에는 겨울의 차가움이 남아 있고, 아침마다 손끝이 시릴 만큼 냉기가 감도는데, 절기는 이미 봄을 선언했다. 그 어긋남이야말로 계절이 가르쳐주는 중요한 진실이다. 변화는 늘 체감보다 먼저 시작되고, 인간은 언제나 조금 늦게 그것을 깨닫는다.
혹독한 겨울을 지날 때면 봄이 정말 오기는 할지 의심하게 된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날에는 이 추위가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고, 얼어붙은 땅 위에서는 생명의 기척을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그러나 계절의 순환은 단 한 번도 약속을 어긴 적이 없다. 아무리 늦어도, 아무리 더뎌 보여도 봄은 반드시 오고야 만다.
요즘의 경제는 어렵고 사회는 불안하고 사람들의 마음은 쉽게 움츠러든다. 하루하루를 버티듯 살아가는 이들에게 희망이라는 말은 때로 공허하게 들린다. 하지만 입춘이 인간에게 건네는 메시지는 분명 있다. 당장 세상이 바뀌지 않아도, 지금 눈앞이 여전히 겨울이어도, 이미 시간은 다음 계절로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실만으로도 조금은 더 버틸 힘을 얻는다.
봄이 저 멀리서 오고 있다. 얼었던 흙이 풀리고 얼음이 스르르 녹고, 작은 싹 하나가 고개를 내밀 준비를 한다. 인간의 삶도 그렇다.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이 좋아지지는 않지만, 견디는 시간만큼 분명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다. 지금의 불황과 불안 역시 지나가는 계절일 뿐, 삶 전체를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믿어 본다.
입춘대길은 서로 어우러지자고 하는 다짐이다. 건양다경은 서로의 볕이 되어주자는 작은 온기다. 혼자서는 견디기 힘든 계절도, 함께라면 조금은 덜 춥다. 문 앞에 붙인 글귀가 단순하더라도 마음의 방향을 여유 있게 해 주는 이유다.
저 멀리서 봄이 온다. 아직은 희미하고, 손에 잡히지 않지만 다가오고 있다. 오늘을 살아내는 작은 인내와 서로를 향한 온기가 그 봄을 더 빠르게 불러올지도 모른다. 그러니 너무 서두르지 말고, 너무 절망하지 않으면 된다. 계절이 바뀌듯 삶도 움직이고 있다. 지금 해야 할 일은 그 흐름을 믿고, 오늘 하루를 성실히 견디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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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 앞에서, 다시 마음속으로 문을 연다. 차가운 바람 뒤에 숨어 있는 따뜻한 볕을 향해. 봄은 이미 시작되었고, 모두 그 안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