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눈밭 위에 나의 통증을 흘려 놓고 싶을 때가 있다
밤새 눈이 내렸다. 소리 없이 하얀 눈이 내렸다. 아침이 되어 세상은 이미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익숙하던 풍경은 모두 지워지고, 어제의 흔적은 예외 없이 하얀 틈 아래로 가라앉아 있다. 하얀 눈은 늘 그렇듯이 조용히 차분하게 온 세상을 덮는다. 하얗게 덮어두고 잠시 멈추게 하는 것처럼. 잠시 숨을 고르게 하고 말을 줄이게 하고, 마음을 고르게 만든다. 그래서 하얀 설원 앞에 서면 차분해진다.
설원은 하얀 원고지 같다. 그러나 익히 알고 있던 원고지와는 다르다. 칸도 없고 줄도 없다. 어디에서 시작해 어디까지 써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마음은 본능처럼 문장을 만들려 든다. 그 하얀 세상을 설명하고 싶어지고 의미를 붙이고 싶어지고, 아련하게 기억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펜을 든 손은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어떤 단어를 적어볼까 하다가 또 멈추게 된다. 너무 하얀 세상이라서 그저 바라보다가 생각으로만 더 멀리 아득히 먼 곳으로 데려간다.
자연은 인간보다 먼저 알고 있다. 무엇을 채워야 하는지보다, 언제 비워야 하는지를. 겨울은 그 가르침의 가장 단순하게 알려주는 계절이다. 나무는 잎을 떨구고 땅은 색을 받아들인다. 자연의 섭리는 직선이 아니라 원을 그리고 인간을 단련하는 것처럼. 움켜쥠보다 내려놓음을 알려준다. 하얀 눈은 내리면서도 말이 없고 의미를 주기에 더 분명해진다.
가끔 하얀 눈밭 위에 나의 통증을 흘려놓고 싶을 때가 있다. 먹물처럼 짙은 감정들을 그 순백 위에 풀어놓으면 조금은 가벼워질 것 같아서다. 그러나 이내 알게 된다. 통증을 내어 놓는 순간, 연민의 그림자가 따라온다는 것을. 연민은 따뜻하지만 또 나를 작게 만든다. 오늘은 그 작은 마음마저도 하얀 눈 위에 올려놓지 않기로 한다. 밤새 내린 눈을 조용히 바라보며 마음으로만 품는다.
내게는 아직 깨어나지 못한 말들이 있다. 아직 문장이 되지 못한 생각들, 이름 붙여지지 않은 감정들. 그것들이 서로 기대며 그대로 숨 쉬게 두는 일. 하얀 설원은 그것을 기억이라고 알려준다. 반드시 남겨야만 기억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지워지지 않았기에 의미 있는 것도 아니라고. 어떤 진실은 흔적 그대로 두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그 겸허함이야말로 자연이 주는 신비다.
돌아보면 내 삶 또한 수없이 덮여 왔다.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시간들이었고, 자주 아쉬워하며 나를 어르고 달래야 했던 시간들. 정해진 과오와 정해진 책임이 습관처럼 돌아오는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단단한 선택은 무엇일까. 하얀 세상 설원 앞에서 그 물음을 찾는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일. 쉽게 분노하지 않는 일. 판단을 조금 늦추는 일. 그것은 세상을 하얗게 덮으면서도 차별 없는 덮임, 그것이 자연의 윤리다.
내 짧은 글로는 하얀 세상 깨끗함을 온전히 표현하지 못한다. 그래서 오늘은 쓰지 않음으로써 마음에 닿는 느낌을 택한다. 햇빛이 눈 위에서 반사될 때 생기는 그 눈부심, 밤이 되면 설원이 조용히 받아내는 별빛. 그 사이 어디쯤에서 나는 나를 내려놓는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생각을 바꾸는 일이다. 하얀 세상이 주는 의미를 오래 기억하기 위한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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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세상을 보면 조용해진다. 그물처럼 얽힌 생각을 하나씩 풀어내고, 굳이 결론에 닿지 않아도 괜찮다는 편안함 속으로 들어간다. 삶의 철학은 그 순간 가까이 있다. 너무 깨끗해서 마음으로만 쓸 수 있는 세상 앞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남겨둔 여백이 다음 발자국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일이라는 것을. 하얀 눈은 아무 말 없이, 그러나 조용히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