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연적 혼자의 시대'를 읽고

'김수영' 사회학으로 보는 시선

by 현월안




혼자 사는 사람이 천만을 넘었다는 소식은 더 이상 놀랍지 않다. 놀라운 것은 그 숫자를 대하는 사람들의 인식이다. 이제 1인가구는 흔한 삶의 방식이 되었지만, 아직은 그 숫자가 마음에 와닿지는 않는다. 왜 혼자 사느냐는 질문에는 이미 답이 정해져 있다. 편해서이고 조건이 안되기 때문이다.



실제의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수천 시간에 걸쳐 1인가구의 일상을 들여다본 연구가 보여주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개인은 커리어를 통해 자신을 증명하고 생존하려는 의도가 들어있다. 성취와 일의 정체성이 모호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관계는 미뤄지고, 방 한 칸의 시간은 길어진다.



혼자는 자유로움이 있다. 젊은 1인 가구는 야근과 주말의 자기 계발하기에는 좋은 조건이다. 1인가구가 누리는 자유는 시간을 스스로 배치할 권리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자유는 종종 일로 흡수된다. 더 나은 성과를 위해 초과근무를 자처하고, 여가를 회복의 도구로 사용한다. 지친 몸을 힐링과 관리로 정비해 다시 일터로 돌려보낸다. 이들은 누군가의 요구에 끌려가기보다,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스스로를 갈아낸다.



돈이 충분하면 괜찮아질까. 종종 경제적 여유가 삶의 빈칸을 메워줄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1인가구의 풍경은 그 믿음을 조심스럽게 흔든다. 혼자인 이들은 식탁에서도 불안정하다. 장을 보고 밥을 짓는 과정이 사라진 자리에는 늦은 퇴근의 배달과 외식이 놓인다. 편리함은 있지만, 삶은 그리 건강하지 않다.



중년 이후의 1인 가구는 노화와 죽음 앞에서 드러나는 차이는 더 선명하다. 다인가구가 돌봄의 부담을 걱정한다면, 1인가구는 사후를 떠올린다. 누가 나를 발견할까, 어떻게 기억될까. 두려움은 죽는 순간보다 발견되는 모습에 있다. 존엄이 박탈된 장면으로 남을까 봐, 외로움으로 인생이 회고될까 봐. 이런 불안은 물리적 고통의 공포라기보다 의미의 공백에서 비롯된다. 퇴근 후와 은퇴 후에 나를 정의해 줄 관계가 없을 때 불안 해 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고민에 놓인다.



그래서 사회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 독립이 고립으로 들어가지 않게 하는 사회적 장치가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개인화가 진전된 사회에서 위험은 혼자가 감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위험은 사회의 모두의 몫이 된다. 기술과 새로운 관계가 언젠가 균형을 찾아줄 것이라는 낙관은 사이의 시간을 간과한다. 그 시간 동안 누군가는 조용히 다친다.



적당한 해답은 없다. 결혼이라는 단일한 틀 바깥에서도 안전하게 돌보고 연결될 수 있는 길을 만드는 일. 시장의 논리와 가족의 논리 사이를 가로지르는 제도와 관습, 요람에서 무덤까지 존엄을 보장하는 공공의 손길. 혼자 살아왔다는 이유로 홀로 버려지는 것이 당연해지지 않도록 하는 사회의 관심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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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의 시대는 피할 수 없는 변화다. 그렇다면 다음은 모두의 관심이다. 연결된 관심으로 주위를 살펴야 한다. 각자의 방에 불이 켜져 있을 때, 그 빛들이 서로를 향해 길이 되도록. 혼자가 보편이 된 사회에서, 외로움이 짙어지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