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에 파릇파릇하게 수놓을 세상이 오고 있다
3월을 갓 넘긴 봄은 여러 모습이 들어 있다. 흔히 봄꽃의 만개를 떠올리며 봄을 기다리지만, 실은 그보다 훨씬 오래, 훨씬 깊은 시간 속에서 봄은 준비된다. 삼월의 초입, 하늘은 아직 연하고 땅은 질척이며, 바람은 겨울의 찬기를 놓지 못한 채 매섭다. 아직 회색의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계절이 바뀐다는 말이 무색할 만큼 세상은 무표정하다. 그러나 바로 그 무표정 속에서 봄은 진지하게 숨을 고르고 있다.
겨울을 견딘 땅은 서서히 풀리고, 물기 어린 땅은 발목을 붙들며 느린 걸음을 요구한다. 아직 아무것도 돋아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이미 수많은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뿌리는 어둠 속에서 방향을 더듬고, 씨앗은 단단한 껍질 안에서 미세한 균열을 준비한다. 생명은 언제나 눈에 띄는 순간보다, 눈에 띄지 않는 시간을 더 오래 품고 있다.
삶도 그러하다.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일은 언제나 서툴고 둔하다. 설렘은 있지만 확신은 없고, 기대는 있지만 두려움이 함께한다. 흔히 시작을 찬란한 빛과 함께 떠올리지만, 실제의 시작은 회색에 가깝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나날,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 속에서 조금씩 감각이 열리고, 마음의 결이 바뀐다.
봄바람은 변덕스럽다. 어느 날은 부드럽게 뺨을 스치다가도, 어느 날은 매서운 꽃샘추위로 등을 움츠리게 한다. 그 바람이 작은 불씨를 키워 화마로 번질까 염려스러울 때도 있다. 그러나 같은 바람이 씨앗의 숨을 틔우고, 닫힌 봉오리를 열게 한다. 바람은 파괴와 탄생의 경계에 서 있다.
봄소식은 한순간의 소식이 아니라, 오래 견딘 시간의 합이다. 찬바람 속에서 수줍게 고개를 드는 야생의 풀잎을 보면, 처음에는 너무 가늘어 금세 꺾일 듯 보이지만, 그 잎은 바람을 맞으며 점점 결을 단단히 한다. 햇빛을 받아들이고, 빗물을 견디고, 자신만의 초록을 깊게 만든다. 생명은 포기하지 않고, 어둠 속에서 멈추지 않고,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끝내 밀어 올릴 뿐이다.
그래서 봄은 여러 모습이 들어 있다. 연둣빛의 생동 뒤에는 긴 침묵과 응시의 시간이 있다. 생명의 끝과 시작과 은근하고 단단한 위엄이 그 안에 스며 있다. 시작은 가벼운 몸짓이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망설임과 두려움을 통과한 뒤에야 비로소 가능한 선택이다. 한 걸음을 내딛는 일, 다시 시작해 보겠다고 마음먹는 일, 어제와 같은 오늘 속에서도 의미를 길어 올리려는 의지야말로 단단한 위엄이다.
땅은 묵묵히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떨어진 잎, 스러진 꽃, 얼어붙은 눈발까지도 품는다. 그리고 시간이 이르면, 그것들을 다시 생명으로 바꾼다. 인간이 딛고 선 이 세상 또한 그러하다. 서로 함께 숨 쉬는 이 공간, 말과 침묵이 오가는 사이의 자리, 아직 쓰이지 않은 언어를 기다리는 여백의 시간. 그 모든 것이 하나의 대지다. 그 위에 뿌리내리고 움켜쥐고, 다시 깨어난다.
깨어남은 늘 조용히 시작된다.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이 달라지는 일은 드물다. 대신 아주 미세한 변화가 반복된다. 생각의 결이 조금 부드러워지고, 타인을 향한 시선이 조금 따뜻해지며, 스스로를 대하는 말투가 조금 너그러워진다. 그렇게 모양을 갖추어 간다. 초봄의 잎사귀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듯, 인간의 삶도 서서히 선명해진다.
봄을 기다린다는 것은 단지 꽃을 기다리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미 시작된 변화를 믿는 일이다. 아직은 찬바람 속에서 가늘고 여린 풀잎이지만, 그 안에 단단한 시간이 자라고 있음을 아는 일이다. 많이 앓았던 겨울 뒤에 선명한 계절이 온다는 것을, 자연이 매년 증명해 주듯이, 인간의 삶 또한 다시 푸르러질 수 있음을 신뢰하는 일이다.
언젠가 온 세상 위에 새순이 파릇파릇 돋아나고, 그 위로 하얀 나비 한 마리가 날아오를 것이다. 그 장면을 이미 수없이 보아왔으면서도, 매번 새롭게 경이로워한다. 자연이 바뀌는 신비는 반복되고 매번 새롭다. 시작은 늘 처음처럼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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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오늘, 가라앉은 기분이 있다 하더라도 또 미소 지을 수 있다. 아직 보이지 않지만 이미 움직이고 있는 것들을 믿으며, 엷은 하늘빛 아래에서 조용히 숨을 고른다. 봄은 오고 있다. 가장 깊은 곳에서, 부드러운 온기로, 조용히 깨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