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 아래, 무릎을 데우던

가끔은 아무 이유 없이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기억이 있다

by 현월안



가끔은 아무 이유 없이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기억이 있다. 그럴 때면 오래전 유년의 우리 집 너른 마당으로 돌아간다. 낮의 소란이 가라앉고 저녁의 그림자가 담장 위로 피어오르던 시간, 마당 한쪽 아궁이에는 넉넉한 솥 하나가 걸려 있었다. 크지 않은 솥이었으나 그 안에는 한 가족의 하루와 계절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곳에는 할머니가 계셨고, 세상에 급할 것 하나 없다는 얼굴로 불을 지키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장면이야말로 내가 이해한 행복의 오래된 기억이다.



아궁이에는 저녁마다 무언가가 끓었다. 잘 볶은 겉보리 두어 줌을 넣은 물이 부르르 숨을 내쉬며 보리차가 되었고, 연기와 함께 구수한 향이 마당을 채웠다. 장작불 앞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이쪽저쪽 번갈아 가며 온기를 나누던 어린 나는, 그저 불꽃이 신기해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지금으로 말하면 불멍이라 부를 그 시간을, 나는 그때 이미 알고 있었다. 타오르다 사그라지는 불길의 호흡을 따라가다 보면, 하루의 서두름이 스르르 풀어졌다.



사람들로 북적이던 종갓집, 우리 집은 해 질 녘이면 할머니와 엄마는 마당귀의 솥에 무언가를 달였다. 종일 종종걸음을 치며 집안을 돌보았으면서도, 저녁만큼은 마치 시간을 접어두기라도 한 듯 평온했다. 장작을 모아 불을 지피고, 빨간 불이 하얀 재가 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모두 불을 지키는 동안 하루를 정리하고, 말하지 못한 수고를 서로의 등 뒤에 조용히 얹어 주었을 것이다. 불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 앞에 앉은 엄마와 할머니의 고단했을 마음을 한 겹씩 벗겨 주었을 것이다.



그때를 떠올릴 때마다, 삶은 어쩌면 그렇게 잠시 멈추는 법을 배우는 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흔히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배우지만, 사실은 멈추어야 비로소 다시 걸을 힘이 생긴다. 날마다 저녁이 와서 무릎을 데워 주었기에, 다음 날의 길이 가능했다. 삐걱대는 삶의 바퀴를 밀고 가는 힘은 그렇게 조용히 쌓이는 온기에서 비롯되었음을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때 책을 통해 철학을 배우지 않아도 먼저 살고 간 사람들은 몸으로 철학을 보여 주었다. 불을 피우고, 물을 끓이고, 무릎을 데우는 사소한 것 속에 삶의 지혜가 스며 있었다. 세상은 늘 바쁘고, 해야 할 일은 끝이 없었지만, 일 많은 종갓집 저녁마다 저마다의 돌보는 시간을 허락했다. 그것은 대단한 지혜였다. 하루를 끝내는 의식이고, 내일을 맞이하는 준비였다.



접질린 마음을 어디에 눕혀야 할지 모르는 날이면, 가끔 그때의 마당을 떠올린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그러나 내 안에 분명히 남아 있는 저녁. 아궁이의 불빛은 이미 꺼졌을지 몰라도, 그때 데운 무릎의 기억은 아직 식지 않았다. 삶을 살아가면서 오래전 그 장면이 나를 다시 일깨운다. 그 시절의 그 시간은 지금의 나를 지탱하는 온기다.



정월 대보름 날 환하게 내려다보던 그 저녁, 마당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공간이었다. 어둠은 두려움이 아니라 쉼이었고, 고요한 충만이었다. 불씨가 재 속에 숨듯, 나의 기억도 그 속에 숨겨져 있다가 필요할 때마다 다시 타오른다. 어쩌면 기억은 그렇게 한 번 데운 무릎으로 오래 걷는 일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꿈속에서라도 그 마당에 다시 들르고 싶다. 할머니 옆에 조용히 앉아 아무 말 없이 불을 바라보고 싶다. 다시 무릎을 데우고, 하루를 다독이고, 내일을 겁내지 않는 마음을 배우고 싶다.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이미 충분히 평온했다. 그리고 이제는 안다. 삶이 거칠어질수록 더 깊은 저녁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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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대보름, 오늘도 마음속 아궁이에 작은 솥을 건다. 조급함 대신 숨을 고르고, 서두름 대신 온기를 올린다. 하얀 재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법을, 다시 떠올린다. 유년의 저녁은 사라졌지만, 그 평온은 여전히 나를 살게 한다. 무릎을 데우던 그 시간처럼, 나 또한 누군가의 저녁이 되어 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