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조금씩 모양을 바꾸어 내 곁에 머무르는 것이다
인간은 꿈을 꾸며 산다. 거창한 꿈이든 소소한 바람이든 꿈은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오래된 동력이다. 어린 시절 도화지 위에 그려 넣었던 화가의 꿈은 오랜 시간 다듬어져 결국 나를 그림의 길로 이끌었고, 책 읽기를 좋아하던 소녀의 습관은 세월을 건너 글을 쓰는 사람이 되게 했다.
몇십 년 전 몽글몽글한 마음으로 꿈을 말하던 때와 비교하면 지금의 나는 조금 다르다. 여전히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일은 내 삶의 중심이지만, 그 일이 언제나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랜 시간 다져온 것이라고 해서 꿈은 절대 쉬운 일은 아니다. 한 문장을 쓰기 위해 수없이 고치고 또 고치며, 한 장의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끝없는 고민과 시간 속에 머물러야 한다. 꿈은 고요한 계획과 외로움을 동반하고, 그 외로움 속에서 나를 다독이며 버텨야 하는 고독한 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두 가지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 그저 고맙다. 매일 가슴이 벅차오를 만큼의 열정이 없을지라도, 오랜 시간 한 방향을 향해 걸어온 발걸음이 지금의 나를 여기까지 데려다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다.
그러나 인생의 절반 가까운 시간을 들여 좇아온 꿈이 때때는 나를 꼼짝 못 하게 붙들어 놓는다. 마치 그것에 노예가 된 것처럼. 긴 시간이 지나고서야 알게 됐다. 꿈에도 함정이 있다는 것을. 인간이 품는 꿈은 대개 너무 선명하다. 마음속에서 오래도록 그려 온 삶의 모습은 마치 빛나는 그림처럼 완벽하게 보인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꿈은 그리 녹록지 않고 또렷하지 않고 또 허상과 같다. 그래서 꿈을 강렬하게 가질수록 현실과의 거리는 크게 벌어진다.
꿈이 주는 동경은 달콤하지만, 그 꿈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의 마음은 설명하기 어려운 박탈감이 있다. 마치 손에 잡힐 듯 보이지만 끝내 닿지 않는 별을 바라보는 기분과도 같을 것이다. 모든 시간을 그곳에 집중했던 순간들, 수많은 공모전을 해야 했던 시간들, 그때의 나는 내 삶이 꿈속에 떠 있는 또 다른 꿈처럼 느껴졌다. 햇살이 아무리 환한 날에도 마음 어딘가에는 불확실한 어둠이 드리워져 있는 것 같은 수시 때때로 느끼는 나만의 감각.
그렇게 지루하고 오랜 시간 꿈을 바라보며 걸어온 끝에, 전문가들 리그에 한 발을 들이게 되었을 때 나는 또 다른 꿈의 함정을 발견했다. 그것은 꿈의 지루함이었다. 한때 인생에 뜨거운 숨을 불어넣던 꿈이 어느새 일상의 의무가 되어 있었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일은 설레는 일이기도 하지만 매일 반복되는 일이기에. 그렇다고 쉽게 놓아버릴 수도 없는 양날의 검을 쥐고 잔잔한 속박의 고뇌에 시달리기도.
그 속박을 또 허물어 버리기에는 그동안 함께 한 가늘고 긴 시간들. 그 시간은 때로 오래도록 사용해 온 낡은 물건과도 같음을. 이미 너무 익숙해졌고 손때가 묻어 있어 쉽게 버릴 수 없는 물건처럼, 꿈 역시 때로는 애물과 같음을. 그래도 잘 다독여 온 덕에 나의 온몸에 일부처럼 장착이 되어 있다.
그렇게 단단히 굳어버린 꿈 안에서 머물러 있는 시간들. 한때 내게 행복하게 만들던 꿈이 어느 순간에는 인간의 간사한 마음이 고개를 들어 또 게을러지기도 하고, 마냥 행복할 줄 알았던 꿈 속에서 길을 잃는 것처럼 낯설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 그래서 이제는 꿈을 바라보는 방식을 다시 생각하기로 했다.
꿈을 언젠가 도달해야 할 목표나 결과물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그 꿈에 갇혀 있었는지도 모른다. 꿈을 반드시 완성해야 하는 어떤 정답처럼 여겼기 때문에, 그 길 위에서 느끼는 지루함과 흔들림을 실패처럼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래서 꿈의 자리를 조금 옮겨 놓았다. 꿈을 미래의 어느 지점에 놓인 목적지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조금 더 풍요롭게 만드는 과정으로 생각하기로.
그렇게 마음속에 단단히 묶여 있던 집착의 매듭을 하나씩 풀어내기 시작했다. 오래된 강박을 조금씩 내려놓자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꿈이라는 단단한 땅 위에 서 있는 나의 진짜 삶이. 흔히 꿈을 미래에 놓인 어떤 빛나는 장면으로 상상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또 알게 된다. 꿈은 반드시 완성되어야 하는 조각상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모양이 달라지는 풍경에 가깝다는 것을.
어떤 날에는 그 풍경이 흐릿해지고, 어떤 날에는 다시 선명해진다. 때로는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때로는 잠시 멈추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조금씩 변해 가는 과정 속에서 삶의 깊이를 안다. 그래서 이제 내게 꿈은 먼 미래에서 기다리고 있는 완성의 순간이 아니다. 살아 있는 오늘의 시간 속에 이미 들어와 있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돈을 받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 예전처럼 뜨겁게 설레는 날도 있지만, 조용히 책상 앞에 앉아 묵묵히 시간을 보내는 날이 더 많다. 그러나 그 모든 시간이 하나의 길 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꿈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완벽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 길 위에서 그 꿈과 함께 나이 들어간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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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꿈은 삶의 어느 순간에도 완전히 끝나지 않고, 조금씩 모양을 바꾸며 내 곁에 머무르는 것. 그래서 오늘도 나는 꿈과 함께 조심히 달래 가며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 지금 이 순간의 삶이 이미 하나의 꿈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