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없이 맨발로 걷는다

겨우내 단단히 얼어 있던 땅이 어느새 풀리고 다시 봄이다

by 현월안




겨우내 단단히 얼어 있던 땅이 어느새 풀렸다. 긴 겨울을 지나며 굳어 있던 대지는 서서히 숨을 고르듯 부드러워지고, 그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의 몸도 조금씩 긴장을 풀기 시작한다. 신발 속에 오래 가두어 두었던 발을 꺼내어 조심스레 흙 위에 내려놓는다.



처음 땅에 닿는 촉감은 낯설다. 겨울 동안 잊고 지냈던 감각이 다시 깨어나기 때문이다. 발바닥을 스치는 흙의 거친 알갱이와 작은 돌멩이들이 발가락 끝을 움츠러들게 하지만, 잠시 후 그 감각은 차츰 부드러운 온기로 바뀐다. 흙 속에서 올라오는 미묘한 따뜻함이 발바닥을 타고 몸속으로 번져 들어온다. 그 순간 비로소 알게 된다. 겨울이 끝났다는 것을, 그리고 땅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것을.



동네 공원에는 맨발로 걸을 수 있는 길이 있다. 겨울 동안 얼어붙어 단단했던 흙이 봄볕을 받아 보드라워지자 사람들도 하나둘 그 길로 모여든다. 마치 오래된 약속을 기억해 낸 사람들처럼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고 흙길 위에 선다.



사람들은 말없이 걷는다. 발바닥으로 계절을 느끼며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누군가는 두 손을 뒤로 모은 채 걷고, 누군가는 눈을 감고 걸으며 땅의 온기를 더 깊이 느끼려 한다. 그 모습은 기도하는 모습과도 닮아 있다. 자연 앞에서 몸을 낮추고 조용히 숨을 맞추는 시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나도 그 길 위에 맨발로 걷는다. 처음에는 낯설던 흙의 감촉이 이내 익숙해진다.



인간은 늘 신발을 신고 살아간다. 단단한 밑창은 사람을 보호해 주지만 또 자연에서 조금 떼어 놓는다. 바람을 창문 너머로만 느끼듯, 흙의 온기도 늘 한 겹의 거리 속에서 경험해 왔다. 그러나 맨발로 땅을 밟는 순간 그 거리는 사라진다. 발바닥과 흙 사이에는 아무런 경계도 없다. 그리고 그렇게 걸으면 몸도 건강할 것이라고 믿게 된다.



그때 아주 오래된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인간 역시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흙은 차갑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하다. 비를 머금으면 질어지고 햇볕을 받으면 부드러워진다. 계절에 따라 색도 달라지고 냄새도 달라진다. 살아 있는 것처럼 변한다.



공원 가장자리에는 작은 새싹들이 파릇하게 움트고 있다. 아직은 연약하고 보송보송한 잎이지만 그 안에는 계절의 힘이 담겨 있다. 겨울의 긴 어둠을 견딘 뒤에야 비로소 밖으로 나온 생명의 모습이다. 나는 걸음을 잠시 멈추고 그 작은 잎들을 바라본다. 세상은 언제나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안다. 봄은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 오래 준비된 끝에야 모습을 드러낸다. 사람의 삶도 어쩌면 이와 비슷할 것이다. 겉으로는 아무 변화가 없어 보이는 시간 속에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무언가가 조금씩 자라고 있다. 때로는 그것이 기다림이고, 때로는 깨달음이며, 또 어떤 때는 용기일지도 모른다.



종종 삶이 그날이 그날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자연을 바라보면 그 생각이 얼마나 섣부른지 알게 된다. 겨울의 땅이 멈춘 것처럼 보이지만 생의 시간은 다음 계절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발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흙의 온기가 점점 또렷해진다. 몸은 가볍고 마음은 한결 느슨해진다. 맨발로 걷는 것은 운동이고 혈의 흐름이 더 좋아질 것이라는 믿음이고, 또 잠시 동안 내가 만들어 놓은 주변 경계를 내려놓는 명상의 시간이다. 인간은 늘 시간을 쫓고 성과를 계산하며 살아가지만, 자연은 그런 방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자연은 여유의 속도로 흐른다. 봄이 오는 속도 역시 그렇다. 서두르지 않고, 그러나 멈추지도 않는다.



바람이 조금 더 부드러워지고 햇빛이 조금 더 길어지는 사이, 세상은 조용히 다른 계절로 건너간다. 흔히 그 변화를 크게 느끼지 못하다가 어느 날 문득 깨닫는다. '아, 봄이 왔구나' 하고. 나는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발바닥 아래에서 작은 돌이 굴러가고 흙이 부드럽게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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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맨발로 걷는 시간이 이유 없이 좋다.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다만 살아 있다는 감각만으로 충분한 순간 말이다. 맨발로 걷는 동안 그 속에서 나도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조용히 기억해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