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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선율이 주는 고요

숨결의 온기를 맞추는 소리

by 현월안




나의 하루를 여는 일은 피아노 음악으로 시작을 한다. 커피잔에서 따뜻한 김이 오르면 조용히 피아노 음악을 켠다. 오늘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7번, 작품 번호 10의 3번. 1798년에 완성된 이 곡은 베토벤이 자신만의 언어를 찾아가는 길목에서 탄생한 것이다. 아직 영웅으로 알려지기 전, 이미 내면에 불을 지피고 있던 시절 작품이다. 그때의 베토벤 음악을 들으며, 글을 쓴다.



첫 악장의 도입부가 공간을 채운다. 단정하게 짜인 형식에서 미묘한 불균형이 느껴진다. 마치 질서 속에서 의도적으로 엇나가려는 자유, 베토벤은 하나의 주제를 변형하기보다는, 여러 개의 아이디어를 쏟아붓는다. 서로 다른 생각들이 서로를 밀치고 공간을 차지한다. 어쩌면 인간의 사고처럼, 혹은 사랑의 감정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다. 하나의 문장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마음의 파편들. 그래서 베토벤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새로움을 듣는다. 불완전한 조화 속에서 자라나는 진실의 소리.



두 번째 악장은 침묵을 닮았다. 선율은 슬픔과 그 억제된 절제가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베토벤은 여전히 소나타 형식의 틀을 지키지만, 그 안에서 인간적인 고백을 꺼내 놓는다. 감정의 음영을 치밀하게 조율한다. 슬픔 속에서도 걸어가야 하는 인간의 발걸음. 피아노의 마지막 음이 사라질 때, 공간엔 묘한 정적이 남는다. 그 정적은 존재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여운이다.



세 번째 악장이 시작되면 공기가 바뀐다. 미뉴에트, 하이든의 흔적이 엿보이지만, 이미 그 너머를 향하고 있다. 첫 주제와 두 번째 주제가 부딪히고, 트리오에서는 손이 교차된다. 연주자는 손끝으로 생각을 바꾼다. 인생도 그렇지 않은가. 한쪽 손이 멈출 때, 다른 손이 나아가야 하는 순간들. 늘 균형을 잃으면서도, 그 속에서 나의 조화를 찾아간다. 베토벤의 미뉴에트는 그렇게 균형을 말해주는 듯하다.



그리고 마지막 악장, 활기찬 론도가 흐르면 온기가 조금 높아진다. 론도 주제가 반복될 때마다 새로워진다. 익숙한 것이 낯설고, 낯선 것이 친숙하게 돌아온다. 변주가 쌓이고 또 쌓여, 음악은 결국 변화의 아름다움을 말한다. 인간의 마음도 그렇다. 사랑도, 글도, 인생도 반복 속에서 조금씩 다른 얼굴을 갖는다. 론도 주제의 단편들이 재현될 때마다, 내가 쓴 글 속 문장의 리듬을 떠올린다. 한 문장을 쓰고, 지우고, 다시 쓴다. 그러나 완전히 같은 문장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글쓰기도 결국 변주의 예술이다.



언제부터인가 글을 쓰기 전에는 피아노 음악을 듣는다. 일종의 의식처럼. 누군가는 향을 피우고, 누군가는 차를 마신다지만, 나는 피아노의 첫 음으로 하루의 감각을 맞춘다. 조용히 흐르는 음악은 내 마음의 온도를 부드럽게 한다. 너무 달아오른 날에는 한 음 한 음이 내 안을 식히고, 너무 차가워진 날에는 피아노 울림이 손끝의 체온을 되돌려준다. 피아노 음악은 그렇게 숨결의 온기처럼 내 곁에 놓여 있다.



나이 들어가면서 이상하게도, 피아노의 맑은 울림이 좋아진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다만, 인간이 나이를 먹는다는 건 점점 더 단순한 것을 사랑하게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젊을 땐 세상의 모든 음악을 탐했지만, 이제는 하나의 선율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단정한 울림 속에 삶의 불안, 관계의 흔들림, 시간의 흐름까지 모두 조율하기 때문이다.



음악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의 침묵까지 듣는 일이다. 음악 역시 그렇다. 음과 음 사이의 공백, 그 여백을 들을 줄 알아야 비로소 음악이 완성된다. 베토벤의 소나타를 들으며 그 여백 속에서 따뜻함을 배운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것들, 보이지 않아도 느껴지는 온기들.



글을 쓴다는 건 어쩌면 음악을 연주하는 일과 같다. 문장은 음표처럼 흘러야 하고, 리듬은 감정의 깊이와 조화를 이뤄야 한다. 너무 서두르면 감정이 깨지고, 너무 느리면 생명이 사라진다. 글을 쓸 때마다 베토벤을 떠올린다. 형식을 파괴하면서도 질서를 유지한 힘. 격정 속에서도 침묵을 아는 결. 그의 음악을 들으며 쓰는 문장은 고급스럽고 고요하다.



오늘도 피아노가 흐르는 공간에서 글을 쓴다. 단어들이 건반 위에 놓이고, 문장들이 리듬을 타며 움직인다. 음악은 내 글의 배경이고, 글의 또 다른 목소리다. 삶의 잔향을 채집하는 일, 그게 글쓰기라면 피아노는 그 잔향의 빛깔을 조율하는 조용한 손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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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베토벤의 마지막 론도가 끝났다. 그러나 음악은 멈추지 않는다. 내 마음속 어딘가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 피아노곡의 여운이 공기 속에 퍼질 때, 알게 된다. 삶이란 결국, 끝없이 이어지는 변주라는 것을. 그리고 그 변주의 한가운데서 저마다의 음을 찾는다. 그것이 베토벤의 음이든, 마음의 숨결이든. 피아노 음악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나는 다시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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