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되면 마음이 움추러든다
불안이라는 감정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셰익스피어의 오페라 리어왕 속 주인공이 내뱉는 독백처럼, 인간은 늘 내 안의 두려움과 마주하며 살아간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이유 없이 가슴이 두근거리고,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조차 경계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인간은 어쩌면 이미 두려움에 길들여져 있는지도 모른다. 두려움은 감정이 아니라 하나의 공기처럼, 사람 곁을 떠돌며 익숙하게 스며든다.
뭉크의 작품 절규는 인간 내면을 잘 보여주는 그림이다. 붉게 타오르는 하늘 아래, 귀를 막은 채 입을 벌리고 있는 인간의 모습. 그 표정은 단순한 공포를 넘어선, 인간이 가진 본래의 불안이다. 세상은 더 빠르게 변화하고 ai의 등장으로 인하여 인간의 고립감이 한꺼번에 뒤섞여 폭발하듯 뿜어져 나온다. 뭉크가 그림 그림을 두고 수많은 해석이 존재하지만, 중요한 것은 인간 내면을 아주 잘 대변한다. 요즘 시대가 아무리 첨단이어도 마음 한구석은 더 외로움과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
불안은 이유가 있는 듯하지만, 그 실체는 모호하다. 누군가는 내일이 두렵고, 누군가는 타인의 시선이 불편하다. 또 누군가는 아무 이유도 없이 불안하다. 그것은 어쩌면 살아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불안은 죽은 자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살아 있는 이가 느끼는 떨림이다. 세상과의 관계가 아직 이어져 있음을 연결하는 신호다.
성경 속 카인은 자신의 동생 아벨을 질투와 분노로 죽였다. 그가 던진 첫 번째 돌멩이는 단순한 질투의 돌이 아니었다. 저주의 시작이었다. 요즘 이유 없는 범죄는 카인이 남긴 그림자와 닮았다. 이유 없는 폭력과, 낯선 이를 향한 무작위의 분노는 내면의 상처를 타인에게 던지는 행위일 것이다. 그것은 윤리가 무너졌다는 경고다. 온라인 공간에서의 비난과 타인의 실패에 대한 비난과 사소한 실수에 대한 집단적 공격까지, 이미 사회의 한 부분은 폭언에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두려움을 치유하는 힘은 사람에게 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닐까. 사랑은 불안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지만, 그 색을 부드럽게 바꾼다. 한겨울의 찬 공기를 녹이는 난로처럼, 사랑은 마음의 떨림을 따뜻하게 감싼다. 사랑하는 사람의 미소와 가까운 이의 위로와, 낯선 이의 친절은 세상을 믿을 수 있게 한다.
겨울이 되면 사람의 마음도 함께 움츠러든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몸은 자연스레 웅크리고, 마음은 조용히 침잠한다. 그래서 해마다 겨울이면 우울이라는 단어가 뉴스에 등장한다. 하지만 자연의 리듬을 떠올려보면, 겨울은 침묵이 아니라 기다림이고 준비다. 나무는 잎을 떨구며 새로운 생명을 위해 뿌리를 단단히 내리고, 겨우내 봄을 기다린다. 사람의 마음 또한 그러하다. 불안과 슬픔은 끝이 아니라 시작을 위한 숨 고르기다.
마음의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아마도 물이 반 잔 남았을 때 이제 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과 아직도 반이나 남았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행복과 불행의 거리는 그 짧은 문장 하나만큼의 차이다. 종종 바깥의 세상에서 행복을 찾지만, 실은 행복은 이미 내 안에 있다. 그저 시선을 조금만 돌리면 된다. 칼 뷔세의 시 "산 너머 저쪽"은 이렇게 노래한다. "행복은 산 너머 저쪽에 있지 않다. 산을 넘고 돌아와 보니, 그것은 내 곁에 있었다"
불안은 사랑을 배우게 하고, 통증은 성숙을 이끈다. 불안 속에서 타인의 손을 잡는 법을 배우고, 두려움 속에서 나를 용서하는 법을 배운다. 세상은 언제나 불확실하고, 삶은 위험을 품고 있지만, 그 안에서도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이 사람이 가진 위대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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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그러나 그 불안은 사람을 쓰러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단단한 사랑으로 이끌기 위한 길일지도 모른다. 차가운 겨울 한가운데서, 사랑의 온기로 이렇게 말하고 싶다. '두려워하지 말아요. 그 떨림은, 살아 있음이고 따스한 온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