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오늘도 누군가의 손을 잡아준다
한 해의 끝자락에 서면 왠지 모를 감정에 빠지곤 한다. 마지막이라는 말은 늘 그렇다. 마지막 잎새, 마지막 수업, 마지막 만찬, 마지막 만남...
모든 시작은 또 마지막이 찾아온다. 그런데 한 해의 마지막은 내 안에서 어떤 문장을 끝내려고 하면서도, 또 끝낼 수 없게 만드는 아쉬움이 뒤섞는다. 12월을 건너는 마음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마지막은 언제나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그 묘한 감성을 가지고 찾아온다.
세월은 왜 흐르는가.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세월은 고요히 제자리인데 인간이 그 시간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것처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느 것도 틀리지 않다. 인간은 제 속도대로 지나가는 시간을 붙잡으려 애쓰고, 시간은 아무 일 없는 듯 통과한다. 그러고 보면 나도, 세월도, 서로에게 등을 보이며 꽤나 잘도 달려가고 있는 듯하다.
한때는 12월이면 거리마다 음악이 흐르고, 크리스마스 조명이 일찍부터 도시를 환하게 비추었다. 누군가는 설레었고, 누군가는 두근거렸고, 대부분은 조금 들떠 있었다. 그런데 요즘의 12월은 조용하다. 차분함을 지나 어둡고, 어딘가 모르게 외롭고, 어딘가 시린 느낌마저 듣다. 하지만 어쩌면 어둡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이 너무 밝아 보여서 상대적으로 더 어두워진 것인지도 모른다. 화려한 풍경 사이에서 나의 그림자가 유난히 길어 보이는 건 아닌지.
요즘 다들 힘들다고 말한다. 내가 배가 부를 때 남의 배고픔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과, 내 등이 따뜻할 때 남의 등이 시린 것을 함께 느낀다는 것과, 내가 건강할 때 남의 고통을 진심으로 헤아리는 일은 말로는 쉽지만 마음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그럼에도 사람은 완전히 외면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여전히 자신의 따뜻함을 조금 덜어내 다른 이에게 건넨다.
며칠 전 보았던 기사 한 편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홀로 사는 어르신들을 찾아가 정기적으로 목욕을 시켜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손길은 목욕을 돕는 일이고 말 못 할 외로움과 노쇠한 시간을 씻어주는 일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위로다. 또 소록도의 환자들에게 수십 년간 묵묵히 손과 발이 되어 준 자선 단체의 이야기가 보도되었다. 아무 대가 없이, 그저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사람이 되어주는 일. 그것만큼 아름다운 풍경이 또 있을까.
도스토옙스키는 "사람이 불행한 것은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12월의 문턱에 서니 그 말이 문득 마음속 깊은 곳에 와닿는다. 흔히 무언가를 잃어야 비로소 그 가치를 깨닫고, 무언가가 지나가야만 그 소중함을 헤아린다. 마지막은 그렇게, 모두를 숙연하게 만든다. 사라지는 것들이 내려놓고 간 빈자리에서 묵묵히 삶의 무늬들을 더듬는다.
마지막이라는 말은 끝을 의미하는 동시에 또 희망을 예고하는 말이기도 하다. 잎새가 떨어지는 자리에서 새순이 돋고, 마지막 악장 뒤에는 고요한 여운이 따라오고, 마지막 만남은 새로운 인연의 가능성을 품는다. 삶의 문장 속에서 마지막은 언제나 시작의 그림자를 함께 달고 다닌다.
그래서 겨울이 주는 감정의 결은 추우면서도 따뜻하다. 차갑고 어둡게만 느껴지는 12월이 오히려 마음의 체온을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좋은 사람을 떠올리게 하고 지나온 날들을 반추하게 하고, 작은 친절 하나를 오래도록 생각하게 한다.
누군가의 등을 따뜻하게 덮어주고 돌아온 사람의 뒷모습에 더 깊이 시선이 머물고, 봉사자들처럼 평생을 누군가에게 내어준 이들의 삶에는 묵직한 철학이 담긴다. 삶은 얼마나 많이 가졌는지 보다 얼마나 따뜻하게 나누었는가로 정리되는 것 아닐까.
시간은 앞으로만 흐르지만, 마음은 뒤를 돌아보며 커진다. 지난날들이 흘러가면서 남겨놓은 자국들을 바라보다 보면, 그 속에서 나의 삶이 얼마나 살아 있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매년 마지막 12월이면 문득 생각이 많아진다.
아마도 12월은 감정의 연습을 시키는 달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고통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하고, 나의 행복을 더 조용히 성찰하게 하고, 나눔의 진짜 얼굴을 천천히 마주하게 한다. 그리고 누군가의 마음에, 또 나 자신의 마음에 남겨놓은 따뜻함이 무엇이었는가를 조용히 묻게 된다.
겨울을 지나며 깨닫는 건, 인간은 누구나 누군가에게 온기가 되고 싶어 하고, 누군가에게서 온기를 받고 싶어 하는 존재라는 것. 그러므로 마지막이라는 말은 외로움이기보다 여전히 나눌 수 있는 온기가 남아 있음을 되짚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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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창밖을 바라본다. 겨울바람이 차고 빛은 짧아졌지만, 그 바람 속에서도 누군가는 오늘도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고 있다. 그렇게 서로에게 마지막이 아닌, 희망이 되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지막의 계절을 지나며 조용히 다짐해 본다. 내가 가진 작은 따뜻함을, 조금 더 과감하게 건네고 싶다. 어떤 마지막이 와도 후회 없이 돌아볼 수 있도록, 살아 있다는 것이 누군가의 위로가 되고 희망이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