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해가 저문다
또 한 해가 저문다. 문득 달력의 마지막 장을 넘기다가 손끝이 잠시 멈춘다. 수없이 오르내리던 날짜들, 미처 이름 붙이지 못한 마음들, 서둘러 지나간 계절들이 종잇장 위에서 부유하다가 어느새 낙엽처럼 사라져 있다. 나의 한 해가 분명 존재했다는 사실만 어렴풋이 남아 있을 뿐, 그 시간을 손에 쥘 수 없다는 것이 어딘가 모르게 서늘하다.
내부를 뒤적여도, 바깥을 두리번거려도 뚜렷한 자취가 없다. 시간은 붙잡힐 듯 가깝지만, 또 돌아보면 한 줌 그림자처럼 흩어져 있다. 올해는 유난히 바빴다. 기대와 환희로 들썩이고 새해를 맞이하는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어느새 흐릿한 안개처럼 이내 멀어졌다. 찬바람이 틈 사이로 스며드는 것처럼, 마음 한편엔 말갛게 식어버린 적막만 남는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나를 스쳐간 시간이 결코 짧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엄청난 시간이었고, 나만의 온기가 담긴 시간이었고, 나를 조금씩 다르게 만들어 준 시간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돌아보면 내놓을 만한 결실 하나 제대로 쥐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무언가 이루었노라 말하기엔 왠지 망설여진다. 하루를 바삐 살아냈음에도 묘한 공허가 기지개를 켠다. 그나마 올해 내 마음을 지탱한 한 줄기 빛이 있다면, 그것은 글과 책이었다. 어느 해보다 글을 많이 썼고, 어느 해보다 깊이 읽었다. 그건 분명 나만의 발자국이다. 다른 이의 잣대로 재어지지 않는 순수한 내 안의 증거다.
그런데도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한 것은 인간의 숙명이다. 애쓰고 노력한 만큼 채워지기보다, 오히려 더 깊은 목마름을 일으키는 순간들이 있다. 많이 읽고 많이 썼음에도 아쉬운 건, 내가 알고 있는 그곳에 아직 도달하지 못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만족은 늘 조용하고 느리고 멀리서 다가오기에, 지금 내가 충분히 가늠할 수 없을 뿐이다.
한 달음에 훌쩍 다가온 12월은 그 마음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한 해의 끝자락에 서면, 충만했던 감정들은 어느새 수위가 낮아지고, 지난 계절을 가득 채우던 생동감은 고요한 바람에 실려 멀어져 간다. 그 자리엔 설명하기 어려운 공백이 남는다. 마치 시든 풀들이 서걱이며 누워 있는 겨울 들판처럼, 문득 그 정적 속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 든다.
그러나 쓸쓸함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사람은 텅 빈자리에서 가장 많은 것을 듣기 때문이다. 가득 찬 마음에서는 흐릿하게 스쳐 지나갔던 삶의 작은 목소리들이, 비어 있는 마음에서는 또렷하게 살아난다.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순간들이 어느 날 문득 떠오르고, 한때 무심히 지나친 사람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뒤늦게 내 어깨를 어루만진다. 공허는 의외로 깊은 위로를 건네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계절은 나보다 먼저 삶의 방식을 알고 있는 스승이다. 봄은 움트기 위해 자신을 부드럽게 열었고, 여름은 열정을 키우기 위해 몸을 활짝 펼쳤다. 가을은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을 가늠하며 단단히 엮어 두었고, 겨울은 가장 단호한 방식으로 비워냈다. 그 순환 속에서 자연은 단 한 번도 조급해하지 않았다.
아쉬움은 인간에게만 주어진 호사인지도 모른다. 아쉬움이 있으니 다시 시작할 수 있고 비어 있으니 채울 수 있으며, 실패한 듯 보이는 날에도 다시 한번 연필을 들 힘이 생긴다. 아쉬움은 성장의 그림자이고, 삶이 여전히 나를 향해 열려 있다는 조용한 신호다.
이제 또 한 해가 저문다. 그러나 시간이 가 버렸다고 해서 내가 잃은 것은 아니다. 읽었던 책은 마음의 결을 바꾸어 놓았고, 썼던 글은 나의 언어를 한 뼘 더 깊게 다듬어 주었다. 지나간 계절은 나를 조금 더 단단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밀물처럼 흘렀다가 썰물처럼 물러난 것뿐이다.
찬바람은 다시 불어오고, 계절은 어김없이 돌아온다. 마음이 가벼워졌다가 무거워지는 것조차 인간답다. 어떤 날에는 길을 잃고, 어떤 날에는 놀랄 만큼 선명한 목적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 모든 시간이 모여 나의 서사를 완성한다.
시간의 결은 조급함을 모르는 듯 유유히 흘러간다. 그 흐름 위에서 계속 흔들리며 자라고, 다시 실패하며 배우고, 또다시 사랑하며 살아간다. 그것이 인생의 온기이고, 계절의 철학이며, 사람이 사람으로 남을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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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저문다. 그러나, 또 한 해가 온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지만 내년에도 나는 나의 속도로, 나의 문장으로, 나의 계절을 걸어갈 것이다. 그것이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