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문턱에서 조용히 그리움을 불러낸다
발화법이 인류 문명의 불씨가 되었듯, 내 유년의 겨울도 언제나 장작에서 시작되었다. 불은 삶을 데우고 마음을 살리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혀주는 가장 오래된 언어였다. 나는 아주 오래전에 알았다. 추위란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건너가는 일이라는 것을. 친정 집 마당 한쪽에 산처럼 쌓여 있던 장작더미 앞에서, 눈을 반짝이며 겨울을 기다리던 아버지의 손길을 보며 배웠다.
친정 집은 사람이 들고나는 종갓집이었다. 행사가 많았고 제사가 많았고, 추운 계절이면 더 분주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먹을거리였고, 추위를 견디기 위한 난방은 아주 중요한 연료였다. 종가의 겨울 행사는 언제나 마당 가운데의 장작불에서 시작되었다. 불꽃이 피어오르면 사람들은 자연스레, 그리고 조심스레 모여들었다. 그 장면은 하나의 의식이었고,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아버지는 겨울이 오기 훨씬 전부터 마당 한쪽에 장작을 높고 단단하게 쌓아두셨다. 겉모습은 단순한 장작더미였지만 그 안에는 한 집안을 책임지는 아버지의 마음과 보이지 않는 결심이 고요히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때의 아버지 얼굴은 겨울의 찬기운을 품어낸 듯한 부드러운 미소였다. 풍족함이 아니라, 가족의 따뜻함만큼은 반드시 지키고자 했던 마음. 그 쌓아 올린 장작더미는 어떤 산보다 듬직했고, 어떤 약속보다 단단했다.
장작불에 소고깃국이 익어가고 밥이 익어가는 냄새, 솥뚜껑 사이로 피어오르던 향기, 사람들이 밥을 기다리며 나누던 온기까지도, 모두 기억 저편의 풍경으로 남아 지금도 겨울이 되면 조용히 되살아난다. 부모님은 이미 모두 떠나셨고, 난방의 편리함이 삶을 감싸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겨울이 오면 여전히 아버지가 장작을 가지런하게 쌓아두던 그 모습을 떠올린다.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흐뭇하게 번지던 미소, 한 번도 크게 말하지 않았으나 그 표정 속에 담긴 것은 종가의 책임과 사랑이었다. 그리고 종가를 잘 이어가겠다는 조용한 다짐이셨을 것이다.
친정 집 장작은 단순한 연료가 아니었다. 추위를 건너기 위한 준비였고, 한 집안의 온기를 지키는 약속이었으며, 사랑이 손에 잡히는 형체로 싸인 풍경이었다. 겨울마다 마당 한쪽면을 산처럼 높아지던 그 장작은 종가를 위해 미리 준비하는 마음이었고, 언젠가 찾아올 추위를 가만히 기다리며 미리 대비하는 책임의 아름다움이었다.
이제야 겨우 아버지가 남긴 따뜻함을 안다. 언제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준비해 둔 마음이라는 것을. 겨울이 오면 문득 떠오르는 장작더미처럼 사랑은 소리 없이 쌓이고, 세월이 흘러도 꺼지지 않는 불씨로 남는다는 것을. 아버지의 마음도 그렇지 않으셨을까. 큰 소리를 내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으면서도 누군가를 위해 묵묵히 쌓아두는 그 마음. 그 마음이 결국 종가의 겨울을 견디게 했다.
어제저녁 서울에 첫눈이 펑펑 내렸다. 첫눈은 매년 비슷한 모양으로 내리지만 그 설렘 속에서 떠오르는 얼굴은 언제나 같다. 눈발 사이로 문득 스며드는 아버지의 미소. 겨울 시작을 알리는 첫추위가 오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말이 있다. "올 겨울은 얼마나 추우려나." 아버지가 늘 중얼거리시던, 그러나 그 속에는 가족을 따뜻하게 지키겠다는 종손의 사랑이었다.
겨울의 문턱에서 조용히 그 미소를 다시 불러낸다. 종갓집 맏이로서 책임을 다하던 아버지의 뒷모습, 장작을 예술처럼 곱게 쌓아 올리며 가족의 겨울을 미리 품어두던 그 따스한 마음. 겨울이 찾아오면 그리움도 함께 시작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리움 속에서 가장 오래 남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게 쌓아두었던 사랑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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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다시 오고, 장작불의 기억은 여전히 내 안에서 타오른다. 그 불씨는 사라지지 않는다. 세월을 건너, 마음의 한가운데서 조용히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