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조용히 자리를 비운다
예전엔 커피를 아무리 마셔도 잠 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어둠은 늘 제때 찾아왔고, 별 무리 없이 그 어둠을 건너 잠에 들었다. 이제는 오후 늦게 마시는 커피는 마음이 흔들리고 밤의 결이 조금씩 틀어진다. 커피 향이 오래 남은 날이면 잠이 쉽게 들지 않고, 새벽의 고요 속으로 빠진다.
새벽 세 시, 세상은 조용히 자리를 비워간다. 겨울 찬바람이 새어들까봐 창문을 꼭 닫아 두었더니, 고요는 오히려 더 두텁게 공간을 채웠다. 자정까지 분주하게 흘러가던 주변의 소리도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추고, 위층과 옆집에서 번갈아 들리던 물소리도 그쳤다. 오직 불규칙한 키보드의 두드림만이 어둠과 나 사이에 작은 떨림을 남겼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그 소리는 마치 나에게 묻는 목소리 같았다. "괜찮지?"하고 조심스레 시도해 보는, 누군가의 위로처럼. 어쩌면 새벽의 적막 속에서 내 손가락들이 대신 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말이 되지 않은 말을 먼저 연습해 보고, 다가오지 않은 아침을 조심스레 만져보는 듯한 소리.
고요할수록, 그리고 쓸쓸할수록, 나를 보듬어 안아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시린 왼손이 오른손을 문지르고, 오른발 발등이 왼발 뒤꿈치를 살포시 덮는 순간. 그런 작은 몸짓들은 괜찮다는 말보다 더 깊은 언어가 된다.
새벽 세 시의 캄캄한 허공은 누구에게나 있다. 살아오며 누구나 한 번쯤은 그 허공 앞에 서서, 길을 잃은 듯 두리번거리다가, 문득 나를 붙드는 무언가를 찾으며 시간을 견딘다. 허공은 그저 잠시 멈추라고, 지금 흘려보낸 마음 한 조각을 다시 들여다보라고, 그렇게 조용히 고요를 내어주는 것이다.
이제 눈이 펑펑 내릴 겨울이 시작되었다. 그 풍경을 떠올린다. 모든 소리가 차분히 가라앉고, 세상이 하얀 숨을 들이쉬는 순간들. 눈은 고요를 덮고 또 고요를 드러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눈 내리는 날의 침묵은 더 따뜻하다. 말 없는 풍경 속에서 나의 체온을 느낀다.
잠이 쉽게 오지 않는 날이면, 이제 억지로 잠을 부르지 않는다. 오히려 잠이 물러서 준 시간을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생각이 열리고, 오래 묵은 마음이 모습을 드러내고, 가만히 살펴보지 않으면 놓칠 감정들이 새벽의 틈 사이로 슬그머니 걸어 나온다. 그리고 또 글을 쓴다. 글은 새벽의 그 차가운 숨결을 데우고, 생각의 파편들을 모아 작은 온기를 만든다. 그러다 보면 어둠이 조금씩 뒤로 밀려난다.
삶이 늘 단단할 수 없다면, 때로는 이렇게 부드럽게 흔들려도 괜찮지 않을까. 잠을 설치는 날도, 예민한 날도, 생각이 너무 커져 밤을 삼켜버리는 날도. 그 모든 날들이 삶의 한 조각이 되어 나를 이룬다. 이제 잠보다 사유가 앞서오는 날은, 피곤함보다 고요히 먼저 도착하는 날이라고. 그 시간을 내 마음의 심해로 들어가는 작은 문이라 여긴다. 그 문을 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문을 지나 다시 나에게 도착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가.
잠을 놓친 새벽이면 고요를 억지로 밀어내지 않고 천천히 받아들인다. 고요는 나를 다독인다. 말하기 어려운 마음을 대신 품어주고, 낮 동안 흘리고 지나간 작은 감정들을 다시 건져 올리게 해 준다.
긴 겨울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겨울은 차가움을 품은 계절이고 마음의 깊이를 확인하는 계절이고, 잠시 멈추어 서서 더 조용히 사랑하는 계절이다. 새벽 세 시의 고요는 어쩌면 내 삶이, 충분히 괜찮다고 말해주는 가장 순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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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새벽의 시간과 화해하며, 조금 더 단단해지고 더 따뜻해진다. 잠을 잃은 밤은 나를 다시 찾게 한다는 사실을 천천히 깨닫는다. 그리고 고요를 견디는 이 시간이야말로 삶을 데우는 은근한 불씨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