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흐르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이 그 속을 질주하는 것인지
마지막이라는 말은 언제나 진한 울림을 지닌다. 마지막 잎새를 바라볼 때의 쓸쓸함, 마지막 수업이 끝난 교실에 남아 있는 고요, 마지막 만찬의 성스러운 긴장, 교향곡 마지막 악장의 울림처럼, 끝이 가진 감정은 진한 울림을 준다. 아쉬움과 그리고 작은 희망까지 뒤섞여 감정의 칵테일처럼 깊고 복잡한 맛을 풍긴다. 한 해를 보내는 일이 그러하다. 마음 한편이 묵직해진다. 무엇인가를 잃었다는 느낌과 동시에, 무엇인가를 얻은 듯 감정이 교차한다.
세월이 흐르는 것인지, 아니면 사람이 그 속으로 질주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어떤 철학자는 시간은 정지한 하나의 큰 바다일 뿐, 그 안을 헤엄쳐 가는 것은 나 자신이라고 했다. 어쩌면 맞는 말이다. 바다는 늘 그곳에 있고, 사람은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삶이라는 항해에서 어느새 꽤 먼 곳까지 와 있음을 실감한다. 숨 가쁘게 달려온 하루, 또 하루가 뒤엉켜 한 해가 되었다.
예전엔 12월이면 어김없이 설렘이 있었다. 거리마다 울려 퍼지던 캐럴, 뭔가 기쁨을 가지고 지나가던 사람들의 가벼운 발걸음, 도시가 약간은 들뜬 분위기였다. 그러나 지금의 겨울은 조용하다. 차분하다 못해 어둡고, 그 어둠 속에서 저마다의 외로움은 더 선명하다.
나의 온기가 다른 이의 추위를 헤아리기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배가 부른 사람에게 배고픔은 상상에 불과하고, 등이 따뜻한 사람에게 겨울의 쓸쓸함은 타인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렇기에 찬겨울 봉사는 언제나 단순한 행동을 넘어선다. 얼마 전 성당에서 독거 어르신을 정기적으로 찾아 목욕을 시켜 드리는 봉사에 다녀왔다. 칼바람 같은 겨울 속에서 이웃의 등을 조심스럽게 닦아주고 독거노인들의 외로움을 사랑으로 닦아주었다. 그 뿌듯한 마음은 어떤 철학 책에서도 쉽게 얻을 수 없는, 인간이라는 향기를 가장 아름답게 드러내는 시간이었다.
목욕 봉사에서 만난 할머니의 미소와 고맙다고 인사하는 진심에서 할머니의 말은 겨울 햇살처럼 가슴에 남는다. 종종 인간은 없는 것에 매달리며, 이미 가진 것들은 무심히 지나친다. 누군가 건넨 작은 친절과 문득 스치는 따뜻한 눈빛과, 나를 기억해 주는 누군가의 짧은 안부, 그리고 오늘이라는 시간이다. 모든 것들은 사실 삶의 큰 축복들인데, 종종 그것을 너무 늦게서야 알아차리곤 한다.
12월의 문턱에 서면 스쳐 지나간 시간들이 연기처럼 피어오른다. 기쁨, 후회, 잊고 싶은 순간, 오래 간직하고 싶은 순간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마지막이라는 말은 끝이 아니라 다음을 준비하는 연결의 시간이다.
마지막이 있기에 되돌아보고, 되돌아볼 수 있기에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삶의 철학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물음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또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것인가에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
마지막을 보내는 차가운 겨울, 품어야 할 것은 아주 작은 따뜻함 하나면 충분하다. 누군가의 등을 조금이라도 덜 시리게 하는 마음, 누군가의 밤을 조금이라도 덜 외롭게 만드는 말 한마디, 그리고 내 옆을 스친 이들을 감사히 기억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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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마지막을 건너는 동안 비로소 배운다. 한겨울 목욕 봉사에서 인생의 소중함을 느낀다. 거창한 성공보다 작지만 진실하고 진심의 따뜻함을 배운다. 나누고 베푸는 마음이야말로 세상을 깊게 아우르는 것이고, 그것이 삶을 사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