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은 언제나 시작을 품고 있다
한 해가 저문다는 말에는 단순한 시간의 끝을 넘어서는 깊은 결이 담겨 있다. 낮 빛은 기울고, 발걸음이 느려지고, 비로소 뒤를 돌아볼 수 있게 되는 시간이다. 흔히 깨우침을 오르는 순간에서 찾으려 하지만, 어쩌면 삶의 진실은 내려오는 길목에서만 모습을 드러내는지도 모른다. 정상을 향해 숨 가쁘게 오르던 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발걸음을 낮출 때 하나둘 시야에 들어온다.
또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삼백육십오일이라는 시간의 수레가 쉼 없이 한 바퀴를 돌았다. 그 위에는 기쁨과 상처와 미움과 화해, 이루지 못한 일과 뜻밖의 선물이 뒤섞여 있다. 그 수레를 끌기도 했고, 때로는 그 위에 실려 끌려가기도 했다. 그렇게 지나온 날들이 저물어갈 때 무지개처럼 겹쳐진다. 일곱 빛깔로 나뉘지 않아도 좋다. 흐릿하고 탁해도 괜찮다. 그 모든 색이 모여 오늘의 나를 이루었다.
톨스토이는 "가장 큰 행복은 한 해의 마지막에서 지난해의 처음보다 나아진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라고 그러나 그 말 앞에서 종종 고개를 떨군다. 무엇이 나아졌는지 선뜻 대답하기 어려워서다. 더 많이 소유하지 못했고 더 높이 오르지 못했으며, 여전히 마음은 흔들리고 서툴다. 하지만 성숙은 언제나 눈에 띄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참아낸 하루와 끝내 놓지 않은 마음과 무너지지 않기 위해 나를 다독이던 그 순간들이 모여 삶은 조금씩 깊어진다.
추사 김정희는 "한나절은 책을 읽고, 한나절은 좌선을 한다"라고 했다. 세상과 마주하는 시간과 자신에게 돌아오는 시간을 반으로 나눈 삶이다. 연말이라는 고요한 경계에서 나에게도 그런 균형이 필요하다. 바쁘게 달려온 시간만큼 멀찍이 물러서 나를 바라볼 여유 말이다. 묵은 감정들을 털어내고 오래 쥐고 있던 미움과 섭섭함을 내려놓을 결심 말이다. 욕심을 모두 버리지는 못해도 조금은 내려놓아야 한다.
꽃은 내려갈 때 비로소 보인다고 했다. 더 높이 더 멀리를 향해 달리던 시간에는 시야에 들어오지 않던 것들이다. 길섶에 피어 있던 작은 꽃들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눈비가 내려도 비바람이 불어도 말이다. 다만 그것을 볼 눈을 갖지 못했을 뿐이다. 행복도 그러하다. 특별한 날에만 찾아오는 손님이 아니라, 지나온 매 순간 속에 숨어 있다.
세밑은 그래서 작은 것에 감사하기 좋은 때다. 무사히 지나온 하루, 여전히 곁에 있는 사람, 따뜻한 말 한마디. 사소해 보여도 그것들은 삶을 지탱하는 가장 단단한 기둥이다. 몸과 마음이 추운 이웃을 돌아보는 일 역시 이 계절이 건네는 오래된 손길이다. 한 해 동안 남의 마음에 남긴 생채기가 있다면 조심스레 내려놓고, 내 안에 박힌 과오는 덜어내야 한다. 그래야 가벼운 발걸음으로 새해의 문턱을 넘을 수 있다.
한 해, 뜻하지 않은 시련 속에서 숨을 고르지 못한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뛰고 싶어도 뛸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삶이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역사는 말한다. 희망을 놓지 않고 견디는 동안, 삶은 어떻게든 살아진다고. 버티는 시간은 헛되지 않으며, 견딤 속에서 또 몰랐던 단단함을 발견하게 된다.
내년은 더 힘들 것이라고 말한다. 국내외의 여건은 녹록지 않고, 불안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더 중요한 것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마음을 다잡는 일이다. 주어진 조건을 원망하기보다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감사와 함께 견디는 이의 계절은 좀 평온하다. 겨울이 길어 보여도 봄은 어김없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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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저문다. 끝은 언제나 시작을 품고 있다. 오늘은 조금 멀리 물러서서 삶을 바라보고 싶다. 한 살을 더 먹는 만큼이라도 성숙해지기를 바라면서. 교만하지 않고 멀리 보되 곁을 잊지 않으며, 마음을 비워 더 담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저무는 해를 보면 언제나 숙연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