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간직하고 싶은 기억, 서둘러 잊고 싶은 기억
집 근처 백화점에 들렀다가 뜻밖의 풍경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유명 화장품 매장 앞, 사람들의 작은 원이 만들어져 있었고 그 중심에는 투명한 상자가 놓여 있었다. 상자 안에는 구겨진 종이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누군가의 손에서 힘껏 눌리고 접히고 뭉개진 흔적들이었다. 옆 탁자에는 종이와 볼펜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벽에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올해 있었던 일 가운데 지워 버리고 싶은 기억을 적으세요. 그리고 구겨서 던지세요"
짧고 단순한 안내문이었지만, 그 문장 앞에서 사람들은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잠시 멈춰 서서 볼펜을 손에 쥔 이들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떤 이는 금세 몇 줄을 적어 내려가고, 또 어떤 이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겨우 한 단어만 적었다. 그리고 모두 같은 동작으로 종이를 힘껏 구겨 상자 안으로 던졌다. 구겨진 종이는 공중에서 잠시 흔들리다가 다른 기억들 위로 떨어졌다. 그 짧은 순간이 마치 작별 인사처럼 보였다.
종이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 일들이 적지 않았다. 말로 다 전하지 못해 남은 오해, 애써 웃으며 넘겼지만 오래 남아 있던 상처,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다는 뒤늦은 후회. 종이는 얇았지만 그 위에 얹힐 기억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나는 한 가지를 적었다.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른 뒤, 종이를 구겨 던졌다. 상자 안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종이가 다른 종이들과 부딪히며 내는 마찰음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소리가 끝나자 마음 한구석이 조금 가벼워졌다.
백화점 화장품 브랜드가 기획한 이벤트의 일부였다. 제품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보였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고 있었다. 누구나 잊고 싶은 기억을 종이에 적어 던져 버릴 수 있는 자리. 단순한 참여였지만, 그 안에는 묘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모든 종이는 무참하게 구겨져 있었다. 글자는 알아볼 수 없었고, 남아 있는 것은 구김의 깊이와 종이의 두께뿐이었다.
그러나 누군가의 아픔과 누군가의 실수, 누군가의 슬픔이 겹겹이 쌓여 있을 것이다. 저마다의 사연은 서로 다르겠지만, 지워 버리고 싶은 마음만큼은 닮아 있었다. 그 앞에서 알 수 없는 위로를 느꼈다. 나만 힘들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과 그리고 모두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버티며 살아왔다는 연민이 동시에 밀려왔다.
생각해 보면 한 해 삶은 늘 그렇다. 오래 간직하고 싶은 추억과 서둘러 잊고 싶은 기억이 어김없이 공존한다. 좋은 순간만 골라 살 수 없고, 아픈 일만 피해 갈 수도 없다. 삶은 언제나 빛과 그림자를 함께 데리고 온다. 다만 그중 무엇을 더 오래 붙들고 살아갈지 선택할 뿐이다. 기억은 마음의 창고에 차곡차곡 쌓이지만, 때로는 비워내지 않으면 숨이 막히기도 한다.
올해가 가기 전, 나쁜 기억을 힘껏 구겨 세상 밖으로 던져 버리는 일은 생각보다 의미가 있었다. 실제로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놓아도 된다는 허락을 나에게 내리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인간은 기억으로 살아가지만, 동시에 망각으로 숨을 쉰다. 모든 것을 붙잡고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고, 사랑해야 할 대상은 너무 많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기분에 따라 비워지고 또 쌓이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슬픔이 가득 찼을 때는 작은 계기로도 눈물이 넘치고, 마음이 비워졌을 때는 사소한 친절 하나에도 다시 따뜻해진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 상처를 받고, 또 관계 속에서 치유된다. 그래서 삶의 철학은 사람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사랑 때문에 아프고, 사랑 덕분에 다시 살아간다.
구겨진 종이가 쌓여 있던 투명 상자는 그래서 하나의 상징처럼 보였다. 누군가의 버려진 기억들이 모여 또 다른 위로의 공간이 된다는 사실. 나의 아픔이 타인의 위로가 되고, 타인의 고백이 나의 위로가 되는 순간. 그 조용한 연대가 인간관계의 본질이 아닐까 생각한다. 모두 서로의 이야기를 다 알지 못하지만, 서로의 무게를 어렴풋이 짐작하며 살아간다. 그 짐작만으로도 세상은 조금 덜 시리다.
좋은 추억만 되새기기에도 짧은 인생이다. 그렇다면 굳이 아픈 기억까지 꼭 끌어안고 갈 필요는 없지 않을까. 때로는 구겨서 던져 버리는 용기도 필요하다. 그것은 더 잘 살아가기 위한 선택이다. 마음을 비우는 연습은 사랑을 더 잘 담기 위한 준비이기 때문이다.
투명 상자 속 종이처럼, 삶에도 수많은 구김이 남는다. 그러나 그 구김이 있어서 오히려 그 흔적 덕분에 더 부드러워지고, 타인의 구김 앞에서 함부로 대하지 않게 된다. 그렇게 사람은 조금씩 성숙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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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로 구겨진 종이를 힘껏 던지던 그 순간을. 그리고 나에게 조용히 말해 준다. 이제는 놓아도 괜찮다고. 남은 시간만큼은 더 따뜻하게 사랑하자고. 삶은 여전히 좋은 일과 그렇지 않은 일 투성이겠지만, 그 모든 순간을 끌어안고 살아갈 이유는 사랑 하나면 충분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