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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천 Jun 29. 2016

벌레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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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생각

인간으로 불리기 참 힘들다..


얼마 전 친구가 학교를 졸업했냐고 묻길래 마지막 학기를 다닌다고 했더니, 내게 대뜸 아직도 '학식충'이냐고 물었다. 학교 다니는 게 왜 학식충이냐고 대꾸하니 이번에는 나를 '진지충'으로 몰아세웠다. 그 친구에게서 ㅇㅇ충 소리를 들은 경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친구에게 저 소리를 들었을 때 내 기분은 어땠을까. 1. 화가 났다. 2. 친구를 미워했다. 3. 그런 단어를 쓰는 친구를 가여워했다. 정답은 4. 나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이다. 막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 우리가 대학생을 대딩이라고 불렀듯이, 요즘은 대딩이 아닌 '학식충'이라는 말로 대학생을 지칭할 뿐이다. 내가 별생각 없이 들었듯이 그 친구도 별생각 없이 말했다.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충'은 우리의 언어 세계에 안착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근 1년 사이에 모든 신분을 나타내는 단어 뒤에 '충'을 붙인 신조어가 부쩍 늘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들은 ㅇㅇ충은 '일베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일베충이었다. 당시만 해도 충은 일베와 분리가 안 되는 일체형 글자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충'은 연가시처럼 모든 단어를 숙주 삼아 번식하는 위험한 놈이었다. 옛날에는 친구가 없다 그러면 개똥벌레가 생각났는데 요즘은 왕따충이 떠오른다. 카페에 아이를 데려오면 맘충, 고등학생이면 급식충. 심지어는 나이가 많은 사람들을 틀니딱딱충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세상에나 틀니딱딱충이라니! 누가 만들었는지 참 독일에서 태어났으면 괴벨스가 되고도 남았을 만큼 창의적인 사람이다. 이래서 쇼미더머니 참가자가 끊이지 않는구나. '충'이 퍼져나가면서 가장 큰 피해를 본 건 '충'의 원래 뜻인 벌레일지도 모른다. '아이고 우리 사장님은 일벌레야 일벌레~' '그 집 자식들은 책벌레라며?'처럼 '성실한 개미'의 축어처럼 쓰이던 벌레가 이제는 '아이고 우리 사장 x끼 야근충이야' '그 집 애들은 독서충이야' 로 바뀌었다.


나 역시 몇몇 충이 들어간 단어에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고 지금도 충을 쓰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주변 사람들이 사용할 때나 가끔 내가 쓸 때에 큰 문제의식을 갖지 않고 있었다. 이처럼 모두가 '충'의 사용에 대해 무뎌지고 있는 때야말로 단어에 대한 생각을 제대로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충을 이대로 둬도 좋은가


충. 그 충만한 울림

충이라는 글자가 어쩌다 시대를 대표하는 접미사가 됐는지 생각해보니, 음절 자체가 갖는 매력이 한 몫했다는 생각이 든다. 장담하건대, 만일 '웅'이나 '둥'이었다면 이만큼 퍼지지 않았을 것이다. '충'을 발음할 때 얻는 소리의 맛은 다른 음절들에 비해 훨씬 찰지다.


 '충'을 소리 내어 말해보자. 먼저 입술이 닭똥집처럼 모이며 앞으로 나아간다. 진취적인 기상이 온몸에 차오르는 기분이 들지 않는가? 그 뒤 입안을 공기로 가득 채운 후 마치 발사하듯 공기를 밖으로 내보내면 우렁찬 소리가 나온다. 충!! 답답하게 공기를 속으로 삼키는 ㅇ,ㄷ 따위는 비교 대상이 아니다. ㅊ은 마치 아우토반 위를 달리는 폭스바겐 디젤차처럼 거칠 것이 없다. 입천장을 휘감으며 세게 소리가 나오는 '경구개음' 중 단연 탁...탁월한 소리 맛이다. 만약 누군가 '충'이 아닌 '둥'을 밀어붙였다고 생각해보라. 급식둥. 너무 귀엽고 매가리가 없어서 비하와 경멸의 기운이 죽어버리지 않는가? 모두가 충을 사랑하는 이유는 충이 'ㅊ ㅜ ㅇ!'이기 때문이다.


이상 '노잼충'의 충 인기 분석이었다.

   

 재미로 써보는 나의 일생

    '충'을 없애기 위한 인류의 노력은 무위로 돌아갔고, 대한민국은 조선시대 이후로 사라졌던 '충'이 지배하는 나라가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급식충을 지나 학식충으로 학생 신분을 마치고, 졸업 후에는 출근충이 되었다가 좋은 여자를 만나 결혼에 성공했으나 그녀는 애를 낳자 맘충이 되었고, 그 애는 '아빠 월급 오지구여 지리구여~'를 외치는 급식충으로 성장하고, 나는 퇴직과 동시에 틀니딱딱충으로 여생을 보내다가 떠난다. 고생만 하다가 죽은 내 묘비명은 '진지충 여기에 잠들다.'이다. 한 번의 삶에서 몇 번의 종 변화를 거친 것일까. 피카츄도 2번 진화가 한계인데 나는 3번이나 진화했다. 진화가 아니고 변화이려나. 21세기는 호모 인섹투스의 시대인가 보다.


다시 충과의 거리두기


우스갯소리는 그만하고, 사실 충이 어디서 나왔고 왜 인기를 끄는지는 전혀 관심거리가 아니다. 중요한 점은 (나조차 충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고 고백했음에도) 충을 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충을 다른 신조어들보다 경계하는 이유는 '충'이 특정 집단을 대표하는 경우, 다른 신조어들과는 달리 그 자체가 부정적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착한 고딩, 돈 많은 돌싱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은 고딩, 돌싱이라는 신조어들이 순전히 '집단'만을 대표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친절한 맘충은 어떤가? 맘충이라는 단어 속에 이미 경멸의 뜻이 담겨있기 때문에 '친절한 맘충'은 어색한, 성립할 수 없는 단어가 되어버린다. 물론 아직 맘충은 급식충, 학식충처럼 전체 집단을 대표하지 않고 '공공장소에서 자기 아이를 돌보지 않는 엄마'에 국한되어 쓰이지만, 단어의 사용 빈도가 줄어들지 않는 한 맘충 역시 곧 모든 어머니를 대표하는 단어로 바뀌고 말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충'은 대상에 대한 생각의 폭을 제한시키기 때문에 피해야 한다. 자신을 의사라고 가정해보자. 어느 날 팔이 마비된 환자가 왔을 경우 그 환자에 대한 판단을 1. 환자에게 문제가 생겼구나 에서 시작하는 의사와 2. 환자의 '팔'에 문제가 생겼구나라고 생각하는 의사 중 병을 치료할 가능성이 큰 쪽은 어디일까? 일견 2가 더 빠르고 정확한 진단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2는 생각의 폭을 팔로 한정해버린다. 2의 경우 여러 시도 끝에 해결책을 찾지 못하여 원점으로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다시 팔에서 문제를 찾는다. 반면 1은 추상적일 수 있지만, 팔을 조사한 뒤 원인을 찾지 못하면 '몸'이라는 넓은 시야에서 문제를 다시 살필 수 있다.

이를 앞서 예로 들었던 맘충에 적용한다면, 애가 우는 것을 보고 엄마를 맘충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팔이 마비된 환자의 문제를 팔에서만 찾는 의사와 같은 행동이다. 그 아이가 왜 지금 우는지, 혹시 배가 고프거나 갑자기 아픈 곳이 생겼거나, 평소에는 저러지 않을 수도 있을 텐데 라는 가정은 모두 제거된 채 모든 문제를 '맘충'으로부터 찾는 것과 같다.


    '낙인 효과' 문제 역시 당연히 발생한다. 한 번 '맘충'이라는 단어 사용에 길들여진다면 울지 않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아이들과 있는 대부분의 어머니들을 예외로 처리하고, 울거나 뛰어다니는 애를 데리고 있는 어머니를 발견하는 순간 그를 표준화하여 그 집단을 규정짓는다. 100번 선방해도 1골 먹히면 욕먹는 골키퍼처럼, 100번 애 관리를 잘해도 한번 애기울음을  못 말리면 바로 맘충이 되는 거다. 사람들은 100번 동안 잠잠한 아이를 보면서 100번의 의외를 생각하고, 한 번이라도 우는 순간 역시 맘충은 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서로를 부정적으로 규정짓는 ㅇㅇ충이 퍼지면 사회의 건전한 토론을 차단시킨다. 충 분류법에 의하면 나는 존재 자체만으로 '한남충'이고, 내 신분은 '학식충'이며, 대부분의 사안에 있어서 내 태도는 '방관충'이다. 그렇게 되면 군대 문제에 있어서 내 의견은 '한남충'의 의견으로, 반값 등록금은 '학식충'의 의견으로, 확신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침묵할 때에는 '방관충'의 의견으로 분류되어 버린다. 나와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사람은 내 생각을 더 들으려고 하지 않고, 내가 왜 그런 생각을 갖게 됐는지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냥 '방관충 꺼지시길'이라고 외치면 편하다. 물론 이는 내가 상대방을 바라보는 경우에도 해당되며, 항상 경계해야 할 문제이다.  

SNS가 발전하면서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아고라가 생겼다. 이전에는 결코 모일 수 없는 규모의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문제에 대해 토론할 수 있게 됐지만, 개별적인 목소리는 오히려 빛을 잃었다. 그래서 우리는 반대편을 벌레라고 부르기 시작했나 보다. 그들을 모두 동등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설득하는 것은 너무 피곤한 일이니까. 벌레에게는 관심을 줄 필요가 없다. 


그냥 솔직히 말했으면 좋겠다. 당신 애가 너무 시끄럽다든지, 너는 이 문제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든지, 지금은 바빠서 너랑 말할 시간이 없다든지. 그 말도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 있겠지만, 상대방을 벌레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훨씬 '인간적'인 행동이다. 


아무튼, 벌레 괴롭히지 말았으면 좋겠다.

  

다음에는 꼰대가르송에 대해서 써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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