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등학교 졸업식 날에 죽기로 결심했다. 죽고 싶은 이유가 있던 건 아니었지만 살고 싶지도 않았다. 굳게 닫혀 있던 옥상 문에 죽음이 유예되는 동안 수많은 죽음을 목도했고, 삶과 죽음에 대한 감각은 무뎌져만 갔다. 죽음은 삶의 길에 서있는 가로등 같다. 후미진 골목의 가로등처럼 한참 동안 깜빡이던 순간을 지나 꺼지기도 하고, 대로변의 가로등처럼 매일 고장이 나기 전 정비를 해서 계속 켜져 있기도 한다. 거기 비친 얼굴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나는 생각보다 지쳐있었고, 가로등 불빛이 너무 눈부셔 끄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했었다.
죽음은 모두가 평등하게 슬픔으로 치환되는 것이라고 배웠다. 그게 이상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죽음에도 값이 있고 질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떤 이의 사고는 산업재해로 처리되지 않도록 119 대신 사설 구급 업체를 불러야 했고, 어떤 이의 죽음은 사회적 경제적 파장에 대해 뉴스에서 며칠 동안이나 보도되었다. 단위가 다르긴 해도 대부분의 죽음은 슬픔보다는 돈으로 여겨졌다. 감정이 수치로 변환된다면 장례식장에서 슬픔이나 그리움의 정도는 과연 어느 정도로 측정될까.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엿볼 수 있듯, 다수의 감정의 총합은 처참한 결과를 보일지도 모르겠다. 이미 허구가 된 사람은 살아내지 못한 시간을, 지루하고 무참한 순간을 계속 살아가야 할 나는 죽음 앞에서 슬퍼할 시간이 없다. 그러므로 나의 죽음 앞에서 온전히 슬퍼해줄 사람을 찾는 것. 인간의 삶은 그 과정에 대한 기록일지도 모르겠다.
동료의 사망 소식을 듣고 이들의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은 그로 인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자리 이동과 보직 변경 등에 대한 것만은 아니었다. 아주 가까운 사람의 사망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누구나 그러듯이 그들도 죽은 게 자신이 아니라 바로 그라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어쩌겠어, 죽었는데. 하지만 난 이렇게 살아 있잖아.' 그들 각자는 이렇게 생각하거나 그런 느낌을 가졌다.
-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죽음이 아무렇지 않던 나는 역설적이게도 죽음에 관한 책들을 찾았다. 내가 느낀 것들이 허구이길 바라는 사람처럼 닥치는 대로 읽고, 또 읽었다. 밤이 사라지면 낮이 사라지는 것처럼, 죽음이 의미가 없다면 삶도 의미가 없었기에. 그저 사라지고, 잊히는 것이라면 나는 지금 지워져도 괜찮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다 읽은 수많은 문장들은 완벽히 소화되지 않더라도 메마른 세상 속에서 같이 외로움과 쓸쓸함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로 적당한 위로가 되었다. 예술가는 그래서 필요한 걸지도 모르겠다. 글로, 붓으로 저마다의 삶과 죽음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어 내기 위해서 말이다.
한 번은 이반 일리치가 이제 그만 가라고 하자 게라심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린 모두 언젠가는 죽습니다요. 그러니 수고를 좀 못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이반 일리치의 죽음, 톨스토이
죽음이 인생의 종결이 아니라 누구나 죽음만큼의 슬픔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일이면 좋겠다. 다행이다. 죽음은 후회조차 남기지 않으니까.
-재, 신용목
사라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파과, 구병모
나는 죽지 못하는 실망과 살지 못하는 복수, 이 속에서 호흡을 계속할 것이다. 나는 지금 희망한다. 그것은 살겠다는 희망도 죽겠다는 희망도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이 무서운 기록을 다 써서 마치기 전에는 나의 그 최후에 내가 차지할 행운은 찾아와 주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다. 무서운 기록이다. 펜은 나의 최후의 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