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 누구인지 아시나요..??’
몇 년 만에 그로부터 온 연락. 나는 이때 정신없이 일하다가 답장을 까맣게 잊었다. 때때로 그가 잘 지내는지 궁금했음에도 무엇에 넋이 나갔는지 8월에 온 연락을 10월이 다 되어서야 답장을 했다. 서운했을 법도 한데 그는 그저 ‘괜찮아. 잘 지내나 보다 했어. 그때 같이 먹은 일본 가정식 떠올라서 연락했어.’라며 변죽 좋게 넘겼다. 그날 이후 예전처럼 근황을 공유하고 안부를 묻고 해묵은 친분을 켜켜이 쌓았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나는 신규 간호사를 훌쩍 넘어선 경력 있는 간호사가 되었고 그는 한의사 면허증을 취득하고 공중 보건의로 복무 중이었다. 어느새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오늘 근무야? 병원은 많이 바빠?‘
‘강화도 일상은 어때. 공보의 할만해? 서울 오면 얼굴 보자.’
‘누나 캠프에서 술도 못 먹는데 취해서 내가 엘베 태워서 숙소로 보낸 거 기억해?’
‘우리 캠프 때 걔 기억하지? 몇 년 전에 우연히 봤는데 잘 지내려나.’
‘누님. 언제 밥이나 드실까요..? 살쪄서 못 알아볼지도 몰라.’
그가 공중보건의로 근무하는 지역에 놀러 가면 드라이브하며 함께 카페도 가고 교동도에 가서 바다 구경도 시켜주겠다고 말했다. 일상을 묻고 추억을 회상하고 못 다 한 이야기를 나누며 연락을 주고받았다. 살이 쪄서 아저씨가 다 되었다는 그의 말에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연애는 안 해? 우리 둘 다 솔로구나. 서로 소개팅을 시켜줘야 하나.‘
‘내 친구가 누나 마음에 든다고 노래를 불렀잖아. 지금도 누나 이야기 가끔 하는데 다시 어때? 누나 이상형이 뭐야?’
‘난 대형견 같은 남자 좋아해. 그 친구는 좋은 사람 같았어. 남자로 느껴진다기보단... 이젠 나도 키 큰 남자를 만나고 싶어.’
그는 친구와 성사되지 못한 소개팅을 다시 주선하겠다고 했다. 그의 친구는 왜소한 체격 때문에 남자로 보이지 않았던 기억이 있어 거절했다.
그는 한 번씩 ‘나는 어때? 179 손들어 봅니다.’라는 말을 했다. 그는 그와 어울리는 귀여운 농담곰 이모티콘을 애용했는데 여전히 농담곰을 보면 그와 카톡을 나누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그땐 플러팅스러운 발언들이 워낙 나를 편하게 생각해서 내던지는 농담으로 여겼다.
‘누나 번호 이거 맞지? 전화해도 돼? 왜 안 까먹었는지 모르겠는데 저 번호는 안 까먹음.’
약속을 잡기 위해 몇 년 만에 전화 통화를 했다. 한결같이 그는 내 번호를 기억했고, 밤새 통화를 이어가도 전혀 어색함이 없었다.
[누나 예전 말투 나오네. 그대로다.]
[너도 그대로야. 어른인 척하는데 여전히 귀여운 아가야.]
[아저씨한테 아가라고 하면 큰일 납니다. 술도 마실 거지?]
새벽까지 이어진 통화 끝에 잡은 약속. 광화문에서 만나!
광화문 2번 출구. 우리는 세종대왕 동상이 보이는 곳에서 몇 년 만에 마주했다. 검은색 롱패딩을 입고 하얀 마스크를 끼고 저벅저벅 걸어오는 그를 보며 손을 흔들고 총총 뛰며 환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는 술을 자주 마셨고 나는 연례행사로 마셨기에 술은 그 혼자 마시기로 했다. 이러나저러나 뭘 해도 즐거울 게 뻔했다. 그는 이제 결혼이 하고 싶다고 했다. 부모님의 권유로 결정사도 도전했으나 유야무야 됐다고 말했다. 나는 그와 달리 결혼보다는 현생을 살아가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다.
“난 아직 결혼할 때가 안 온 것 같아. 진짜 결혼하고 싶은 사람을 만나면 그때 하려고.“
“누나는 집에서 결혼 이야기 안 해서 좋겠다. 예전 여자친구랑 그냥 결혼을 했어야 하나.”
그는 버스커버스커의 '사랑은 타이밍'을 불렀고 나는 옆에서 따라 부르며 싱긋 웃었다. 1차는 해장국과 수육, 2차는 그가 좋아하는 피자를 먹기 위해 근처 펍으로 이동했다. 피자와 샐러드를 주문하고 그는 생맥을 나는 달콤한 과일 맥주를 마셨다.
“아까 걸어오면서 누나 보는데 소개팅 할 때 저런 여자가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실은 나도 그가 너무 멋있어 보여서 깜짝 놀랐다. 술기운에 달콤했는지 펑펑 내리는 눈에 마음이 몽글몽글했는지 그는 술에 취해 발그레한 볼이 둥글게 부풀도록 웃으며 그보다 더 부푼 마음을 내뱉었다.
“누나는 날 남자로 볼 가능성이 없을까? 누나 진짜 예쁘지 않냐. 누나가 날 남자로 볼 수도 있는 건가?”
그는 수차례 그 말을 반복했다. 한숨을 작게 쉬다 나를 보며 귀엽게 웃었다. 설렘과 당황 그 사이에서 헤매는 나의 눈동자. 이렇다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입을 꿈뻑 수줍게 웃으며 맥주만 마셨다. 내 이상형은 멍뭉미 가득한 대형견. 다정한 말투에 적당히 키도 크고 체격도 좀 있고 하얗고 귀여운 남자. 생각해 보면 그는 내 이상형에 몹시 가까운 남자였다. 3차로 노래방을 가기로 했었으나 눈이 너무 많이 내린다는 핑계로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왔다. 설레고 당황스럽고 마음이 이상하고 복잡해서 겁쟁이처럼 도망쳤다. 이러다 좋은 사람을 잃을까봐, 그게 겁이 났다.
그날 이후 그는 잔잔하게 나의 잔상에 남아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궁금했지만 용기가 나질 않아 한동안 연락을 못 하다가 고작 안부 인사 한두 마디 건넨 게 전부였다. 그해 여름, 궁금함과 그리움에 여행 정보를 핑계로 연락을 했다. 그는 전역 후 한의원에 취직하여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됐다고 했다.
‘한의사로 경쟁력도 없고 페이도 적고, 내가 부족해서겟지.’
‘내 직업은 답이 없다. 한의원도 너무 많고. 돈도 못 버는데 혼자 살다 죽어야지. 근심 가득이야.’
‘쉬는 날 완전 녹초돼서 쓰러져있기 바빠. 누나 얼굴도 봐야하는데 거절은 아니고 보류 정도로 해줘.’
연락을 이어가는 내내 근심 가득한 이야기와 자책을 늘어놓았다. 사회초년생 시절의 내가 떠올라 그를 위로하고 응원해주고 신세한탄을 들어주고. 그렇게 연락을 주고받던 중 용기내 약속을 잡으려 했으나 운동을 하다 발가락 골절상을 입었다. 병가를 길게 쓰고 움직일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생일 축하해! 건강이 최고야!‘
그의 생일에 가족들과 나눠 먹으라며 망고 선물과 함께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그 당시에 그는 새로운 여자친구가 생겼고 그 여자친구는 내가 보낸 망고를 보며 질투와 함께 나를 ’망고 누나‘라 지칭했다고 했다. 그로인해 우리는 한동안 연락이 끊어졌다.
이후 해를 넘길 때까지도 광화문에서 마주한 날의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 다른 남자와 소개팅을 하거나 데이트를 해도 불쑥 그가 떠올랐다. 그날의 우리는 수줍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