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부터 1일

by 주디


연락을 안 하고 지내는 동안에도 그는 잔잔하게 나의 잔상에 남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제법 오랜만에 그로부터 카카오톡 메시지가 왔다.


‘누님, 전화할 수 있나..???’


그는 그동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몇 달 전, 술에 취한 채로 사고가 나서 병원에 꽤 오래 입원했었으며 다시 태어난 기분으로 소중한 사람들한테 연락하는 중이라고 했다.


[난 그때 다시 태어났다고 생각해. 누나는 소중한 사람이라 연락했어.]

[왜 말 안 했어. 누나가 병문안 갔을 텐데.]

[전 여친이 누나랑 연락하지 말라고 해서 작년 10월 누나 생일에도 연락 못 했어.]


1시간이 훌쩍 넘게 그동안 나누지 못한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회포를 풀었다. 그는 나와 같은 학교, 같은 과를 졸업한 후배와 짧은 연애를 한 적이 있는데 우연히 그 여자분을 통해 내가 떠올랐다고 말했다. 게다가 캠프를 함께 한, 그가 호감을 가졌던 여자 이야기를 하며 ‘그때 누나가 종종 상담해 주고 내 이야기 들어줬는데. 걔는 잘 살고 있나?’라고 말했다. 전처럼 친한 누나동생 사이의 대화라고 치부했다.


[그래서 말인데 나랑 연애하면 내가 잘해줄 수 있지!]

[갑자기 나랑 연애를?]

[응. 우리가 더 알아볼 사이는 아닌 것 같고. 난 누나랑 연애하고 결혼하고 싶어.]


앞에 모든 이야기는 고백을 위한 명분이었다. 나는 소위말하는 ‘금사빠’는 아니다. 마음을 여는 데까지 골몰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그였음에도 쉽사리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넌 좋은 남자친구일 것 같아. 다만 당황스러워서 알아보는 시간을 조금만 더 가져보자.]


넘치도록 반가운 그의 연락에 이런 답변이라 미안했다. 그의 고백이 어찌나 임팩트가 있었는지 그날 밤 그가 꿈에 나왔다. 그날의 고백을 시작으로 그는 빠른 듯 느린 듯 귀여운 직진을 했다.


‘내일 몇 시 퇴근이야? 퇴근하고 피자 먹자. 아님 피자 없이 몸만 갈까?‘

‘그러고 보니 침놔준 적이 없네. 침 맞으러 올래? 운동하느라 아픈 곳 많다며.’

‘머리가 길어서 말리는 게 오래 걸린다고? 다음번에 말려달라는 거구나.’


그중 가장 기분 좋게 만든 이야기는 내 글에 대한 관심이었다.


‘누나 블로그에 글도 다 읽었거든. 누나 생각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어.’

‘난 내 글 읽어주는 사람 좋아해!’


내 글을 가장 많이 읽어주고 궁금해하는 사람과 결혼해야겠다는 막연한 결심이 있었는데 그는 여전히 내 글을 가장 많이 읽고 좋아해주는 남자다. 사적으로 심란한 일들이 겹쳐 그와의 약속을 미뤘을 땐 귀여운 투정도 부렸다.






‘날 좋아하는 게 아냐.’라는 그의 투정조차 귀여워 보였다. 그때의 나는 여러 일들이 겹치며 내 감정에 집중을 하지 못해 아쉽고 미안한 순간들이 있었다. 1년 만에 마주 앉아 치킨을 먹기로 한 날. 그는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내일부터 1일해!‘라더니 정작 자리에 앉자마자 서울에서 김포까지 출퇴근하느라 고되며 대표 원장님과의 마찰로 업무 스트레스가 많다는 이야기만 한참 늘어놓았다. 그의 투정을 들어주며 좀 더 현명한 위로를 전할 수도 있었을 텐데 반가워할 틈도 없이 스트레스를 표출하는 그의 모습에 당황해 별다른 반응을 하지 못했다. 나는 리액션이 좋은 편임에도 그와 함께 할 땐 종종 삐그덕거리는 로봇이 되곤 했다.








그는 광주에 있는 한의원으로 이직 준비를 하느라 주말마다 광주를 오가는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틈틈이 나와 연락을 나누며 소중한 시간을 보냈다.


[누나, 나 보고 싶지? 누나가 오라고 하면 당장 택시 타고 갈게.]

[진짜로 오게? 무리하지 마. 너 피곤하잖아.]

[내가 안 보고 싶어? 지금 광주에서 출발하면 새벽엔 도착할 수 있어.]


그는 갑자기 나를 보러 오겠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나는 그가 피곤할까 싶어 무리하지 말고 약속 잡아서 편할 때 만나자고 답했고 그럴 때마다 그는 귀여운 투정을 부렸다.


부산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 후 밤늦게 서울로 돌아온 날이었다. 그는 나를 보기 위해 집 근처 동네까지 찾아왔다. 피곤할 텐데도 보러 와준다는 말에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실은 나도 그가 보고 싶었다. 지하철역 앞에서 기다리는 내내 무척이나 설렜다. 그는 피곤함에 짓눌려 어깨가 한껏 말린 채 터벅터벅 계단을 걸어 올라왔다. 그와 주고받은 눈빛에 따뜻함을 느꼈다. 우리는 술집에 앉아 치킨과 진로 소주를 앞에 두고 둘의 이야기를 공유했다.


“광주로 이직하면 우린 앞으로 어떻게 데이트를 해야 하지?”

“누나 본가 천안아산역 근처니까 거기서 만나자. 바빠서 자주는 못 올라올 거야.”

“좋아. 내가 쉬는 날 광주 놀러 갈게. 무리해서 안 와도 돼.”


마주 잡은 손이 따뜻했고 피곤함에 젖은 눈동자가 너무 예뻤다. 나는 그날 밤, 그의 눈이 몹시 예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순간 존재하는 공기마저 날 기분 좋게 만들었다. 그리고 중요한 깨달음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이 남자를 아주 많이 좋아하게 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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