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어와 상처 사이
그가 광주로 내려가기 며칠 전, 사소한 오해가 생겼다. 그는 오고 가는 대화 속에서 상처받은 게 분명해 보이나 대수롭지 않은 듯이 아니라고 말했다. 몹시 신경이 쓰이는데 괜스레 묻기가 조심스러웠다. 나는 갈등이 발생하면 잠시 생각을 한 뒤 속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요청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편이었다. 그는 한참을 곱씹거나 덮어두고 갈등을 최소화하거나 나의 속도보다 늦게 표현하는 편이었다. 불편한 감정을 잘 표현하는 편이었음에도 아마 나를 배려했을 것이다. 우리가 만나는 동안 나의 표현 방식이 그가 지난 연애에서 받은 상처와 숨겨둔 방어기제, 불안과 회피 성향을 자극하게 만들었다.
[오늘 누나 보러 갈까?]
[아니야. 어제도 왔잖아. 오늘은 편히 쉬어.]
[진짜 아니야..?]
같은 서울 내에 지하철로 1시간 거리에 사는 그와 나. 나는 그가 편히 쉬기를 바라는 것이었고 그는 나름의 화해를 요청한 것이었다. 전화 통화로 충분히 대화하며 풀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내가 피한다고 느꼈다. 내가 그의 기분과 감정을 물으면 '아니야.'라고만 답하는 그를 보며 되려 나를 피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불편한 대화를 끄집어내기보다 갈등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참고 덮는 쪽이었다. 그때의 불만이 상처였을 텐데 한참 후에나 들려주었다. 어긋남 속에서도 서로 조금씩 마음을 열고 애정표현을 하고 다시 다가가려 노력했다.
[누나. 다담주에 휴가 내고 부산 와! 나 교육 듣고 같이 놀자.]
그는 서울, 부산, 광주를 오고 가는 극한의 스케줄에도 틈틈이 만남을 위한 노력을 이어나갔다. 그가 광주로 이직한 뒤 교육, 시험, 공부, 과도한 업무로 하루 한 번 연락하는 게 무척 어려웠다. 한참 기다리다 연락을 하면 잠들거나 근무 중이었고 답장 또한 한참 뒤에나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회식이 많은 곳이라 긴 연락을 주고받기가 어려웠다. 자연스레 나는 연락을 먼저 하기보다 기다리는 쪽이 되었다.
[나 주말에 여유 있는데 광주 올래? 고민해 봐. 아니다. 무조건 와. 그냥 와. 알겠지?]
그가 잠시 여유를 낼 수 있는 주말 반나절을 보기 위해 광주에 가기로 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하기로 했다. 앞으로 우리가 맞춰가기 위해 서운한 것도 터놓고 서로 바라는 점도 이야기하자고 약속했다. 광주로 이직한 뒤 처음 보는 날이기에 설레는 마음으로 광주행 KTX에 올랐다. 태어나 처음 광주 송정역에 방문했다.
[대표 원장님이 불러서 스터디랑 회식을 가야 하는데. 근처 카페 가서 기다려줄 수 있어? 방금 통보받았어. 미안해.]
이때부터 기다림의 시작이었다. 그는 갑자기 불려 나가 스터디와 회식에 참석해야 한다고 했다. 시간을 맞추기 위해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광주에 도착했지만 그의 집 근처 스타벅스가 마감을 할 때까지도 그는 오지 않았다.
'왜 나를 이런 날에 불렀어...'
결국 그의 집에 가서 새벽까지 기다리다 잠이 들었다. 그는 새벽 1시 반쯤 만취한 상태로 귀가를 했다. '수고했어!'라며 그를 반겼지만 그는 혀가 꼬부라져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의도치 않았음에도 만취한 모습을 보니 기다림에 지쳐 '안 취했다더니. 대화를 할 수 있겠어?'라는 말이 먼저 나왔다.
"나중에 서울로 다시 이직하면 한 달이라도 쉬면 좋겠다. 그땐 내가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
서운함이 몰려왔지만 막상 얼굴을 보니 반가웠다. 광주에서 일을 배우고 경력을 쌓은 뒤 서울로 다시 오게 되면 조금이라도 쉬었음 했다. 지쳐 보이는 그가 안쓰러웠고, 나와 시간을 보냈으면 하는 마음에 언제 올지 모를 먼 미래의 이야기를 내뱉었다.
"나 아침 일찍 일어나서 보수교육 참석해야 해."
"뭐? 그럼 나는 아침 일찍 돌아가야겠네?"
"나도 아까 들었어."
그는 몇 마디 대화를 하다 픽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와 얼굴을 마주한 건 그게 전부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 피곤함에 지친 채로 교육을 나가며 '누나. 이따 연락해! 조심히 올라가.' 하는 그를 보며 굳은 표정을 비췄다. 그는 숨은 고민이 많아 보였고 스트레스와 불안도가 썩 높아 보였다. 10년을 넘게 봐왔기에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그땐 그의 고민에 내가 방해가 된다고 느꼈다. 둘 사이에 있었던 일들과 대화를 돌이켜보니 건강하지 못한 관계 같다는 생각이 커져 각자 삶에 집중한 뒤 다시 이야기해 보자는 연락을 남겼다. 그와 연락을 하지 않는 며칠 동안 삶이 우울하게 느껴졌다.
[누나, 잘 지내니. 얘기 못했던 일이 있어서 연락을 못했어. 해결되길. 나중에 보아...]
그의 연락을 받고 찰나의 안도감을 느꼈다.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그의 안위를 걱정하고 그리워했다.
애정이 깃든 사이에 다툼과 오해는 금세 용해되는 사사로운 것이었다.
"누나. 나 지금 서울인데 내려가기 전에 잠깐 볼 수 있어?"
나는 교육과 시험이 있는 날이라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지쳐 잠이 들었다. 그의 연락을 받고 피곤함도 잊고 재빨리 용산역으로 향했다. 그를 보니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그의 볼살과 턱살을 만지고 그는 나의 뱃살을 만지고 서로 귀엽다며 웃었다. 사사롭고 단조로운 대화 속에서도 웃고 있었다. 용산역에서 KTX에 오르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아쉬움에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누나! 겨울에 휴가 있을 것 같은데 같이 여행 가자."
"좋지. 어디 가고 싶어?"
"팔라완이나 타이중? 후쿠오카도 좋고."
"어디든 좋아."
한동안 그와 여행할 생각만으로도 고된 업무를 이겨낼 수 있었다.
[천안아산역 지나가면 항상 누나 생각이 나.]
[내려서 울 아빠한테 삼계탕 해달라고 해! 아빠가 해주시는 삼계탕 진짜 맛있어.]
[오. 나도 한 입만. 아버님 연락처 좀 알려줘.]
그날 우리는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 그는 KTX에 오를 때마다 나를 떠올렸다고 말했다. 나는 그와 남녀사이로 발전한 뒤 하루도 빠짐없이 그를 떠올렸다.
이브닝 근무를 마치고 퇴근을 한 뒤 씻고 침대에 누워 그가 보고 싶다며 전화를 걸었다. 그는 만취 상태였다.
[누나. 어차피 우린 이제 못 만나. 내 상황이 이런데 어떻게 만나냐고!]
실은 개인사에 안 좋은 일이 있다며 엉엉 울었다. 숨겨둔 이야기에 대한 충격보다 못 만난다는 말이 더 슬펐다. 나는 덩달아 눈물을 흘리며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다 전화를 끊었다.
'노력이라도 더 할 걸 지치기만 하다 끝나네. 힘들겠지만 술 줄이고 건강 잘 챙겨. 그래야 행복해져도 행복한 줄 알지. 안녕.'
예고 없는 이별 통보에 메시지를 남긴 뒤 한참을 울었다. 얼마 뒤 그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날 본인이 노력을 안 한다고 말했는지, 뭐라고 했기에 이런 말들을 남겼는지 만취해서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했다. 그날 나에게 털어놓은 이야기들은 구태어 꺼내지 않았다.
[내가 오해했나 봐. 우리가 못 만난다고 해서 이대로 이별인가 했어.]
[음. 아니야. 누나. 내가 잠깐이라도 보러 서울 갈까?]
[다음에 와. 너 힘들잖아. 오늘 오면 몇 시간 보지도 못하고 힘들게 광주로 돌아가야하잖아...]
[이야기하자면서 왜 자꾸 안 된대. 누나 생각만 하지 말고!]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그는 상당히 불안정하고 예민해 보였고 해결할 일이 많다고 했다. 정신없이 바쁘고 불안하고 힘든 일 투성인 와중에 나를 위해 노력을 하고 있었다. 난 그것조차 부담이 될까 싶어 그 호의를 받기보다 인내하기 바빴다. 며칠 뒤 화해를 하기 위해 그를 보러 가기로 했다. 분명 나를 기다린다고 했는데 회식에 지쳐 잠이 들었는지 여러 번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걱정되는 마음에 집까지 찾아가 술에 취해 잠든 그를 깨웠다.
"어? 누나, 뭐야? 언제 왔어?"
"그 반응은 뭐야? 이럴 거면 왜 부른 거지."
그는 잠들어서 나를 맞이한 게 부끄러워 제대로 반응하지 못한 것이었는데 나는 그를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요즘 추나 하느라 어깨가 너무 아파."
"내가 주물러줄게."
나는 지친 마음을 억누르며 그의 왼쪽 어깨를 주무르고 문질러줬다. 진지한 대화를 하려고 하면 피하고 장난스레 받아치는 모습에 화가 났다. 그는 조심하며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노력이었는데 그땐 나만 노력하는 것 같았다.
"너는 날 왜 만나? 그냥 외롭고 만날 사람 없어서?"
난 언제까지 기다리기만 해야 해?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은 그만했으면 좋겠어. 우리는 서로에게 소중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잖아. 노력할 만큼 했는데,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그게 잘 안 되는 것 같아. 나는 참다 터져 날이 서 있었고 그날의 대화 속에서 그는 큰 상처를 받았다. 그가 나에게 마음에 담아두지 말라고 했던 말들이 자꾸만 서운함으로 번졌다. 그를 만나러 갈 때마다 어떻게 하면 기분 좋게 해 주고 위로가 될까 생각하면서도 막상 마주하면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서운해하기 바빴다. 나 역시 그렇게 내뱉고 한동안 마음이 불편했다.
나는 화해의 요청으로 며칠 뒤 그의 집을 찾아가 선물과 편지를 남기고 돌아왔다.
우리가 만나고 내가 너를 걱정하고 생각하다 한 계절이 지나갔어. 상처받은 마음이 신경 쓰여. 너는 따뜻하고 섬세하고 좋은 사람이야. 덕분에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어. 힘들고 바쁜 와중에도 나를 보러 와주고 연락해 줄 때마다 많이 설레고 고마웠어. 너를 힘들게 한 것 같아 미안해. 네가 좋아하는 피자도 먹고 여행도 가고 침도 맞고 아픈 어깨도 주물러주고 싶었는데 마음속에 남길게. 마음껏 표현하고 잘해주고 사랑해 주지 못해서 너무 아쉽고 아프다. 세상이 너를 힘들게 해도 나는 네 편이야!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아도 좋으니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누나. 난 사랑하는 사람 생기면 그 사람 밖에 없어. 우리는 다시 만나는 게 좋겠어.]
그는 다시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