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 이게 근육통에 좋은 한방 영양제야.”
갈근탕도 포로 된 거 있고 키네시오 테이프도 찾으면 있을 거야. 누나 운동하니까 그것도 가져갈까? 몇 년 전 그가 선물한 오적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헬스장을 다니던 시절의 나를 위해 근육통에 좋다며 오적산을 들고 왔다. 고마움에 입꼬리 끌어올려 활짝 웃고 그의 눈앞에서 두 포를 연달아 먹었다.
“남자는 관심 없으면 연락 안 해. 누나 바보네.”
눈치를 줘도 몰라. 그가 건넨 오적산엔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섭취 중인 영양제가 많은 관계로 꽤 오랜 시간 없어지지 않았다. 영양제들 사이에 놓인 오적산을 발견하고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네가 선물해 준 영양제 잘 먹고 있어. 거의 다 먹어가. 고마워!”
실은 여전히 잔뜩 남아있지만 이렇게라도 대화 속에 웃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이따금 영양제들 사이에 놓인 오적산을 보며 그 시절의 그가 떠올랐다. 예쁜 눈동자로 나를 보며 오적산을 건네주던 그 모습.
왜 인생은 쉽지 않을까.
신은 없는 것 같아.
세상은 왜 악한 사람들한테 관대할까 난 착하게 열심히 사는데.
그는 한동안 통화를 하거나 카톡을 할 때마다 이런 말들을 반복했다. 내가 보고 싶다고 하더니 한동안 연락을 피하고, 버리지 말라더니 다시 밀어내고. 그는 마치 내가 실수를 하길 바라는 사람처럼 굴며 온갖 불만을 쏟아냈다. ‘좋은 사람 만나.’라는 말과 함께. 그럴 때마다 나는 감정적으로 서운함을 쏟아냈다. 나를 신경 쓰기엔 그의 삶이 버거워서겠지. 삶의 고난과 감정의 소용돌이에 갇혀 허우적거렸다. 통화를 하다 서로 대화가 어긋나고 상처 주는 말이 오가면 전화를 끊고 눈물을 훔치며 며칠을 후회했다. ‘너의 힘듦을 헤아리지 못해 미안해.’ 매번 마음속으로 이 말을 삼켰다. 오랜 시간을 함께하며 편했던 사이라는 이유로 나도 모르게 상처를 줬을까. 고단한 하루 끝에 위로의 말을 제대로 건네주지 못해 미안한 날이 많았다.
너는 여전히 나에게 특별하고 소중해. 반짝반짝 빛날 거야. 누나는 언제나 네 편이야!
나는 말보다 글이 편한 사람이었다. 책을 읽다 고군분투 중인 그가 떠올라 응원 메시지를 보냈다. 바쁜 와중에도 한 번씩 내 응원을 보며 퍽퍽한 삶이 미세하게라도 유연해지길 바라며. 나란히 누워 그가 해준 팔베개에 기대 나른한 공기를 공유하며 도란도란 대화하다 잠들던 순간들이 있다.
“나중에 결혼하면 둘이 이렇게 누워서 하루 일과 공유하다 잠들겠지. “
창문으로 들어온 빛이 달빛이든 별빛이든 우리의 삶을 응원하고 있을 거라 믿었다. 그는 힘든 상황이 많다며 방황하는 날이 많았다. 좋아하는 상대의 감정이 동기화가 되는 순간들이 있다. 그의 표정과 말투, 한숨에도 하염없이 흔들렸다. 일상생활을 이어나가면서도 이따금씩 감정의 소용돌이가 나를 갉아먹었다. 둘 사이는 삐그덕거리고 감정은 버석하고 그를 떠올리면 애틋함과 연민이 가득했다.
사람이 힘들면 샤머니즘을 찾는다더니. 신점이든 타로든 태어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처음으로 타로 동생(곧 신내림 받을 예정인 타로마스터 지인)과 이야기를 나눴다. 주변 사람 아무도 그와 만나는 걸 몰랐는데 유일하게 많은 걸 아는 친구였다. 무속 신앙을 맹신하진 않지만 그녀의 촉을 속이긴 쉽지 않다.
“언니. 요즘 남자 때문에 고민이야? 우리 동자가 그러는데 둘이 엄청 질긴 인연이래.“
“어떻게 알았어?”
“둘이 인연줄이 굵어졌다 얇아졌다 절대 안 끊기니까 잡지도 놓지도 말고 냅둬. 그분 상황상 지금은 언니한테 집중할 수가 없어. 점점 성장하고 나아질 거야.“
“그게 다 보여…?”
“동자가 그 아저씨 몇 년 동안 언니만큼 안정적으로 옆에 있을 여자 안 보이니까 둘이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래. 결혼하면 좋은 사람이래. 힘든 와중에 언니에 대한 생각이 박혀있대.“
둘은 서로 절대 못 놓을 걸. 글쎄, 둘 사이가 불안정하고 흔들리는데 이렇게 가는 게 맞을까. 아무래도 내가 놔줘야 우리 둘 다 행복할 것 같았다. 그가 위태롭고 불안정한 외발자전거에 올라 하염없이 흔들리는 동안 나는 그저 방해꾼 같았다.
[내가 널 언제쯤 놓을 수 있을까 생각해 봤는데.]
[누나. 놓기 쉽지 않잖아.]
[이젠 못 하겠어. 내가 너 놔줄게. 내가 너의 삶에 방해가 되는 것 같아. 너무 힘들어…]
서로를 위해 끝내는 게 맞아. 화수분처럼 터져 나오는 눈물과 함께 온갖 감정을 쏟아냈다. 그땐 내가 그를 놓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는 선뜻 날 잡지 못 하면서도 앞으로 둘이 함께 하고 싶은 것들을 늘어놓으며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1시간 동안 통화를 이어가며 무거운 감정이 정리되지 않아 두려움에 전화를 끊었다. 그는 하루, 이틀, 일주일 후 등등 밤마다 전화를 했다. 나는 모질게 밀어내는 말을 하면서도 미안함에 울고 그에 대한 마음을 비워내지 못했다.
[날씨 추우니까 따뜻하게 하고 자.]
[난방비 아까워서 그냥 패딩 입고 잘래.]
[전기장판 없어?]
[어. 여기에 짐 이것저것 두기가 좀 그래서.]
[너 그러다 감기 걸려. 또 아프면 어떡하려고.]
[이것 봐. 누나는 아직 나 좋아한다니까.]
[그러면 뭐가 달라지니…]
[그래…]
[전기장판 주문했으니까 내일부터 꼭 켜고 자.]
그는 환절기마다 지독한 감기에 걸렸다. 내가 전복죽을 배달해 줬는데 연락을 못 받을 정도로 컨디션이 저조해 다음날이 되어서야 먹었다. 그럼에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일하는 그가 안쓰러웠다. 아무리 난방비가 폭등했다지만 추운 날씨에 전기장판도 없이 잔다니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누나. 이렇게 하는 거 맞아?]
인증샷을 보내달라는 나의 말에 그는 전기장판이 도착하자마자 매트리스에 펼치고 사진을 찍어서 보내줬다. 내가 먼저 작별을 고했음에도 하루도 잊은 적이 없다. 어찌나 지독한 인연인지 나는 그를 놓지도 잊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의 잔정과 나의 연민으로 우리는 작별했음에도 연락을 이어나갔다.
‘나는 널 언제쯤 놓을 수 있을까.’
그는 고마워, 미안해라는 말을 내뱉는 것조차 어색해할 만큼 감정을 회피하며 불안한 현실에 갇혀 지냈지만 그의 위태로움, 불안정함 모든 것을 사랑하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