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그 자리에
내가 그에게 끝내자는 말을 한 이후에도 우리는 인연의 끈을 붙잡고 연락을 이어나갔다. 아무렇지 않은 듯 건넨 말 한마디에도 서로에 대한 걱정, 다툼, 그리움 등 헤아릴 수 없는 감정들이 걸려 있었다. 나는 밀어내면서도 그의 연락에 응했고 그는 이런저런 말들을 내뱉으며 나와의 연락을 이어나갔다.
누나, 간호사도 끊임없이 계속 공부해야 해?
옷 행색이 그렇게 중요해? 명품이 꼭 중요한가.
인생은 왜 쉽지 않을까.
누나 자? 나 병실에서 공부 중이야.
주무십니까. 술 마셔서 그런 건 아닙니다.
주식 완전 망했어. 돈 많이 벌어서 돈가스 사 먹어야지.
나랑 다시 만나보든가. 그럴 생각 없지….
예전부터 했던 생각인데 누나랑 결혼하면 진짜 좋을 것 같아.
나 보러 와줘. 술 한잔 하면서 이야기하자.
그는 마음을 고백하거나 업무 스트레스를 공유하고 간혹 이해할 수 없는 아무런 말들을 쏟아내기도 했다. 덕분에 연락은 두 달 넘게 이어졌으며 어느새 그의 연락을 기다리는 날들도 있었다.
[네가 얼마나 힘들면 나에게 털어놓을까. 너의 힘듦을 위로해 줄게.]
[왜 내 마음을 몰라줘. 내가 힘들어서 연락한다고? 왜 그렇게 생각해!]
그는 그런 뜻이 아닌데 좋아하는 마음을 몰라주는 게 답답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는 여전히 회피와 불안을 위태롭게 오갔다. 온갖 가시가 자신을 상처 입히는 줄도 모른 채 낮아진 자존감과 방어기제로 뒤덮인 속마음을 쉽게 내놓지 않고 말과 행동이 달랐다. 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내 마음을 떠보고 다시 회피를 반복하면서도 자신을 잡아주길 바라고 있었다.
'난 엄마 같은 여자랑 결혼할 거야. 근데 넌 아니잖아.'라더니 다음날부터 몇 번이나 '너랑 결혼하면 참 좋을 것 같은데.'라는 말을 하고 '돈이 최고인가 봐. 능력있고 돈 많은 남자 많잖아. 너도 우리 사이 다시 생각해 봐.' 하면서 다음날 보고 싶다고 다시 보자는 말을 했다. 내가 그와 끝낸 건 대부분 이런 이유였다. 밀어내고 다시 붙잡고 감정을 숨기면서도 알아주길 바라고, 불만을 털어놓고 맞춰가자며 소통을 요구하면 대화를 피하고. 어느 날은 다정한 마음을 표하고 어느 날은 가시 돋친 말들로 나를 아프게 했다. 사과 한 마디를 원한 건데 그는 한숨을 쉬며 말을 삼켰고 상처는 켜켜이 쌓여 신뢰를 잃어갔다. 그의 낮은 자존감과 치부를 나에게 보이는 건 신뢰와 이해로 소통할 수 있는 창구였는데 그는 약점이라 여겨 회피하고 나를 밀어내기 급급했다. 회피형은 난데 그에게 회피하지 말라며 화를 냈다. 내가 준 상처가 있다면 충분히 사과하고 노력할 준비가 되어있었는데 그는 그럴 여유와 면역이 없었다. 내가 준 상처는 나만이 치료해 줄 수 있고 그도 마찬가지인 것을 그는 모르는 것 같았다.
"다들 크리스마스야."
"크리스마스네. 함부로 나가면 깔려 죽어. 조심해."
크리스마스 3일 전, 그는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자는 건지 사진과 메시지를 보냈다. 12월 근무 신청을 할 때 크리스마스 혹은 연말을 함께 보내기 위해 오프를 신청할까 한참을 고민했다. 그가 나를 밀어내는 동안 다가갈 용기가 없었고 정리해야 함을 알았기에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당일, 그와 통화를 하며 우리 둘에 대해 꽤 감정적인 이야기가 오고 갔다.
[누나. 좋은 사람 만나.]
[전부터 네 말 들으면서 느끼는 건데 애써도 네가 원하는 여자는 아닌 것 같아.]
좋은 사람 만나. 그는 종종 이런 말을 남겼다. 여전히 밀어내고 또다시 붙잡았다. 그는 유기불안에 빠진 사람처럼 굴다가 다시 나를 밀어내고 그럼에도 내가 옆에 있어주길 바랐다. 전화를 끊고 골몰하다 메시지를 남겼다.
아까 뭐라고 해서 미안해. 난 네가 진짜로 행복했으면 좋겠어. 기억이든 감정이든 정리를 많이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감정적으로 대해서 서로 불편하게 만들었어. 미안해. 작별인사만 하고 사과는 못 한 것 같아서.. 이런 일 없도록 잘 정리할게. 어디서든 행복하자. 연말 잘 보내고 새해도 잘 보내. 답장 안 해도 돼.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순간을 함께 할 걸, 옆자리를 지켜줄 걸, 답답하고 힘든 현실을 살아가는 그에게 하루쯤 현실을 잊게 해주는 시간을 선물해 줄 걸 하는 아쉬움이 든다.
나는 그를 꾸준히 떠올렸으며 걱정했다. 잊으려는 노력을 부단히도 했지만 그럴수록 더욱 그가 그리웠다. 일이 바쁘거나 힘든 일이 생겼을 때 그가 보낸 메시지, 전화 한 통에도 힘이 되었는데 이젠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가 아니라는 사실에 무척 슬펐다. 나는 때때로 그리움의 연락을 남겼다.
OO야. 보고 싶어.
몇 달 전에도 아프더니 또 감기 걸렸어? 며칠은 술 마시지 말고 따뜻하게 자고 죽이랑 약 먹어.
서로를 위해 놓아준 건데 이렇게 힘든 줄은 몰랐네.
너는 나랑 좋았던 기억이나 행복했던 순간이 있어?
나는 코인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경치 좋은 여행지를 가면 동영상을 찍어 그에게 보냈고, 그는 일상 혹은 사회생활을 하며 드는 고민에 대해 공유했다. 나는 마침내 그를 놓을 수 없는 마음을 깨달았다.
[나 아직 너 좋아하나 봐. 끝내자고 했지만 자꾸 생각나. 너무 보고 싶어.]
[누나. 서울에 갈 일이 있는데 잠깐 보러 갈까?]
그는 얼마 뒤 새하얀 케이크와 함께 몇 달 만에 내 눈앞에 나타났다. 그는 밤늦게 서울에 도착하기로 했지만 밀린 업무로 인해 아침이 되어서야 도착했다. 나이트 출근을 하는 날이었기에 아침에 퇴근을 한 뒤 잠깐이나마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눈썹 문신을 해서 이상해 보이지 않느냐는 그가 어찌나 귀여워 보이던지 폴짝 뛰며 한참을 웃었다. 그가 남기고 간 잔향에 종일 기분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