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여름에게

by 주디


우리는 뜨거운 여름에 처음 만나 무수한 해를 지나 뜨거운 여름날 작별 인사를 나눴다. 예전의 나는 그가 내 인생에 나타나준 게 행운이라 여겼다. 편하고 즐겁고 꽤나 잘 맞았던 우리 사이가 미세한 균열이 번져 삐그덕 거렸고 나눈 대화들은 온통 상처였다. 나는 그가 내 인생에서 사라지는 것을 상상한 적이 한순간도 없었다. 우리가 가는 길에 폭풍우가 기다린다면 두 손 마주 잡고 이겨내려 했지만 그는 매 순간 외딴섬으로 도망쳐 동굴로 들어가 홀로 비바람을 맞고 있었다. 그가 홀로 버티는 동안 나는 힘든 시간을 넘어야 했다. 나는 동굴 앞에서 행복하지 않은 시간을 보내느라 눈물 흘리는 순간이 늘어갔다. 나 또한 그를 멀리하고 밀어냈다. 그는 불안도가 상당히 높은 사람이었다. 동굴로 회피하는 게 모두가 평화롭지 못 한 선택이라는 걸 그는 알게 될까. 사랑하며 함께 하는 시간이 소중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함께 하지 않은 것은 우리의 선택일 뿐. 그리고 내가 그와 이별을 결심한 이유가 되었다.








똥차 가고 벤츠 온다 했던가, 글쎄. 살아보니 좋은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오지 않는다. 그와 이별한 후 약 한 달은 온 감정을 억누르고 살았다. 과거에 나눈 메시지를 보며 눈물을 훔치지 않았고, 그의 귀여운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며 그리워하지도 않았다. 이제는 새로운 남자를 만나야지 결심했다. 잡고 있는 인연을 흘려보내지 않으면 좋은 인연이 다가와도 잡을 수 없으니까 그를 모두 털어내기로 했다. 귀여움, 연민, 잔정 모든 것이 소멸해가고 있었다. 마음을 활짝 열고 들어오는 소개팅을 하며 두 번씩은 꼭 만나려고 했다. 단기간 내에 몇 명의 소개팅 상대를 만났고 마음을 열기 위해 노력했다. 감사하게도 소개팅을 한 남성분들은 죄다 나를 마음에 들어 했다. 하지만 상대에게 죄스럽게도 만날수록 허탈함만 늘어갔다. 새로운 남자를 만날수록 나는 그를 좋아했을 뿐, 연애 감정을 원하거나 외로움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별 후 후폭풍이라는 것을 살면서 경험해 본 적 없었다. 한 달 동안 감정을 억누르며 생각보다 괜찮은 날들을 보내면서도 후폭풍이 어떤 식으로 닥쳐올지 몰라 두려웠다. 어떤 감정과 어떤 추억이 나를 아프게 할까. 어느 날 그가 꿈에 나왔다. 썩 괜찮지 않은 모습으로. 아프고 힘들어 보였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걱정을 하면서도 이제 그럴 수 없는 사이라는 생각에 걱정을 삼켰다. 한 달이 다 되어가던 무렵 또다시 그가 꿈에 나왔다. 나와 데이트를 하며 편안하고 행복하고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나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내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표정이었다. 그날부터 수많은 감정들이 나를 아프게 하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표정을 많이 봤으면 좋았으련만. 좋은 말만 골라서 해줄걸. 그때 더 행복하게 해 줄걸. 최선을 다 하지 못해 아쉽고 예전 연인들 만큼 잘해주지 못한 게 미안했다. 다음에 꿈에 나오면 더 잘해줘야지. 시도 때도 없이 그를 떠올리다 원망하기를 반복했다.


'소중한 우리 사이를 왜 이렇게 만들었어. 좋게 마무리할 수 있었는데, 작별 인사 하고 잘 끝냈으면 좋았잖아. 왜 관계를 다 망쳐서 너를 떠올리면 원망하게 해. 나는 너 원망하기 싫어. 좋은 기억으로 남기고 싶었단 말이야.'


시간이 나면 러닝을 하며 펑펑 울었다. 원망과 그리움과 배신감과 애증의 감정이 몰아쳐 해답 없는 소용돌이에 갇혀 버렸다. 그에게 상처 준 것들이 떠올라 미안함 마저 들었다. 더 좋은 여자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에 미안함과 원망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오고 갔다. 사과를 하고 싶었고 사과를 받고 싶었다. 그렇게 끝맺음을 하고 한 달 반쯤 됐을 무렵 그에게서 연락이 왔고 우리는 찜찜한 감정을 털고 사과를 주고받기로 했다. 그와 마주했을 때 이전과 같이 좋아하는 감정은 아니었다. 젖어가는 술잔으로 감정이 격해진 탓인지 그는 눈물을 쏟아내며 미안함을 표했다.


“악어의 눈물처럼 느껴지겠지만 나 때문에 누나가 그렇게 지냈다고 하니까 너무 미안해. 누나가 이제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도 한 달 동안 울지 않았어. 모든 감정을 억누르고 일상생활 잘했지.”


나는 그의 눈물에 감정이 동기화되며 먹지 않던 술을 마셨다. 나에게 미안함을 표하던 순간은 잠깐이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힘든 상황과 감정을 쏟아내기 바빴다. 이러려고 나간 자린 아닌데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위로인지 모를 말들을 늘어놓았다. 그는 몇 날 며칠 동안 내 말은 들리지 않는 건지 그의 이야기만 일방적으로 늘어놓으며 힘든 감정을 쏟아내기 바빴고 나를 배려하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의지를 많이 하면서도 내가 더없이 편해진 건지 과거의 불만을 늘어놓았다. 상처 주는 행동을 하고 과거의 연인들과 비교하며 그를 향한 나의 마음을 왜곡했다. 사과를 주고받았지만 그와 연락을 이어간 걸 후회했다.


“우리 요즘 예전 누나 동생으로 지내던 시절 같다. 왠지 너랑 다시 그렇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아니야. 나는 누나랑 그렇게 못 지내. 이렇게 연락하다가 나도 바빠지면 연락 안 해야지. 곧 잠수탈 거야.”


실은 그의 말과 행동이 매우 불편했다. 전혀 편하지 않은 사이처럼 느껴졌지만 나를 격 없이 편하게 대하는 그를 보며 나도 편한 것처럼 행동했다. 우리는 대체 언제쯤 인연이 끊기는 걸까. 그와 대화를 나눌수록 멀어지고 싶었다. 나는 그와 다시 한번 이별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었다. 좋지 않은 방법인 줄 알면서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인연이 끊기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내가 사라진 시간 동안 예상보다 더 힘들어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거야?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어떤 마음인지 알려주면 좋은데. 할 말이 있어. 전화받아줘. 병원 다녀오고 아픈데 계속 연락했어. 생사는 알려줘야지. 이런 식이면 더 이상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가 없잖아. 이유를 듣고 싶어. 부탁할게.]


그의 연락이 쌓여가도 줄곧 피했다. 회피하는 그가 미웠는데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내가 못나 보이기도 했다. 마음이 복잡했다. 결국 나는 한참이나 쌓인 그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나의 마음을 오해했고 나는 그의 행동을 오해했다. 우리는 마음을 열고 서로 오해했던 상황과 감정을 공유했다.


[나는 부산에서 이미 너랑 작별 인사를 했어. 너의 마음도 다 알았고, 이제 나랑 연락 안 하겠다고 했잖아. 너 편하게 잠수 타. 네 말대로 연락해도 서로한테 좋을 게 없을 것 같아.]

[누나가 나를 그렇게 많이 생각해 주고 좋아해 주는 줄 모르고 오해했어. 그날도 예의를 차리고 사과하려던 자리에서 내가 실수를 많이 한 것 같아. 술 때문에 누나를 잃을 뻔했으니까 이제는 술 안 마실 거야. 누나를 생각하면 애틋한 마음이 들어.]


그날 이후로 우리는 거의 매일 만남을 이어나갔다. 시간을 쪼개 만나고 연락을 주고받으며 낮아진 신뢰와 오해했던 감정을 회복하고 새로운 추억을 쌓았다. 서로에 대한 감정이 어땠는지 왜 그때 그런 행동을 했는지 어떤 모습을 원하는지 대화를 주고받았다. 나는 그에 대한 경계심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그는 누구에게도 드러내기 어려운 치부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렇게 힘들어하면서도 항상 나를 웃게 해 주려 노력했다. 나는 그와 있을 때 가장 많이 웃고 10년 된 연인처럼 편하고 애써 맞추지 않아도 잘 맞았다. 나는 그를 챙겨주고 힘들 때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고, 그는 나를 항상 웃게 해 주고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주는 존재가 되었다. 우리는 다시 좋아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조심하려고 노력했지만 넘치는 감정을 숨기진 못 했다. 우리는 서로를 무척이나 많이 생각하고 좋아했다.


“누나에 대한 감정이 생각보다 더 많이 깊어. 여자친구 이상의 감정이라 생각해. 누나는 내가 왜 좋아?”

“그냥 좋은데. 보면 귀엽고 너랑 있는 게 가장 재밌어.”


그는 본인이 왜 좋은지 종종 이유를 듣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나는 한 가지 이유를 고르기가 어려웠다. 조건 없이 누군가를 이렇게 많이 좋아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사랑을 대하는 방식을 배워가는 중이다.









이 글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끝맺음을 내내 골몰했다. 결말을 골몰하다 2주나 늦게 글을 완성하게 되었다. 글을 완성했을 때 나의 감정이 정리가 될까 싶었지만 종국엔 그 이상의 감정과 생각을 나누게 되었다. 정서적 허기는 돈으로 해결할 수 없듯이 우리는 무엇보다 소중한 서로를 얻었다.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듯 우리는 당연하게 서로의 옆자리를 지켰다.


“누나는 10년 된 여자친구 같아. 그리고 엄마 같은 존재야.“

“나도 너랑 10년은 연애한 느낌이야. 누구와 대체될 수 없는 존재.”

“만약에 헤어져도 누나랑은 연락하고 지내고 싶어. 하지만 난 헤어지자고 안 할 거야. 절대로.”


내가 ’사랑해.‘라고 말하면 그는 ’고마워.‘라고 답했다. 그는 여전히 내 글을 가장 많이 읽고 궁금해하고 좋아하는 남자다. 뜨거운 여름날 새긴 추억만큼 무척이나 뜨거운 감정과 시간을 나눴고 작열하는 태양처럼 잊지 못할 기억을 남겼다. 고운 정보다 질긴 미운 정까지 나눈 사이. 진짜 인연은 끊어져도 다시 만나게 된다던데 우리는 진짜 인연이라 느껴졌다. 진심에서 오는, 마음에 깊게 닿은 우리 둘의 인연이 무척 소중하다.


나의 다정하고 소중한 여름은 새로운 계절을 맞이했다.


안녕, 나의 여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