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간의 오만과 편견은 아주 사사로운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말 한마디, 제스처, 표정, 찰나의 행동 등. 오만함을 품은 채 오해로 시작한 편견은 우리의 서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행복하게 마주 보고 웃으며 사랑을 속삭이는 순간보다 서로를 원망하고 상처받아 울던 시간이 더 길다. 이는 모두 우리의 오만함과 편견 때문이다.
2.
오랜만에 만남의 장소를 정하기 위한 밤샘 통화가 즐거웠고 광화문 광장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환한 미소를 지을 때 무척 해맑았으며 오고 가는 대화가 편했다. 알코올이 눈동자에 필터 깔아주니 서로가 빛나보였고 펑펑 내리는 눈을 우산 하나로 피하며 온기를 느꼈다. 그 순간 그가 불 쏘시개를 당기듯 고백 아닌 고백에 꽤 오랜 시간 마음이 요란했다. 몇 번의 계절이 지나고 다시 만나 빠른 듯 느리게 플러팅을 주고받으며 서로에 대한 꽤 좋은 기억만을 고집했다.
“누나가 예전부터 나를 귀여워해주고 잘 챙겨줬는데.”
“너는 그때도 누나 마음을 잘 헤아려주고 나를 재밌게 해 줬어.”
코드가 잘 맞으니 애써 웃겨주려 하지 않아도 함께 있으면 소소한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서로에게 좋은 사람의 프레임을 씌우면 한 번의 실수나 실망스러운 모습을 봐도 큰 타격을 받게 된다. 우리는 곧장 서로에 대한 서운함을 마음속에서 무럭무럭 키웠다.
“내가 알던 누나가 맞나. 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야. 나한테 화난 거 아니지?“
“예전엔 편하게 대화가 잘 흘러갔는데 요즘은 왜 자꾸 안 좋은 이야기만 하고 날카롭게 대하면서 내가 친절하길 바라는 거야?”
과거의 우리는 장난을 치고 일상을 공유하면서도 서로의 기분을 살피며 대화가 원활하게 흘러가던 사이였다. 사소한 다툼도 금세 회복할 만큼 이렇다 할 갈등도 없었다. 초반부터 서운한 감정을 수면 위로 꺼내 싸우더라도 서로 잘 풀었다면 오랜 시간 괴롭진 않았을 텐데. 그는 분명 나한테 서운함이 있어 보이는데 말을 하지 않았고 난 그 모습을 회피했다. 그도 내가 서운한 걸 알면서 외면했다. 우리는 서운한 마음을 삼키고 눈치를 보며 꾹꾹 눌러 담다 한 번씩 터져 각자 상처받은 마음만 내세우며 상대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그를 둘러싼 현실이 괴로웠고, 난 힘든 그를 보며 힘들어했다. 서로의 민낯을 드러내며 싸우기도 했고 감정적으로 바닥을 치기도 했다.
”알고 보면 우리는 애초부터 맞지 않는 사람들이었던 걸까. 아님 서로가 좋은 사람이라고 오해한 걸까.“
덮어두고 버티면 괜찮겠지 하며 보낸 세월은 만남이 지속되며 꽤 오랜 시간 아파하고 후회했다. 간혹 떠올리면 인생에서 도려내고 싶을 만큼.
그가 내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오만쯤은 쉽게 용서했을 텐데
엘리자베스가 처음엔 자존심 때문에 용서할 수 없었던 다아시의 오만함은 시간이 흐른 뒤 서로에 대한 미안함과 서툶으로 변해간다. 그 과정이 우리와 닮아있다.
3.
‘신포도’와 같은 마음으로 편견을 품고 자기 합리화를 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에 품은 신포도는 우리가 그저 친구사이였다면 갖지 않았을 못난 생각이다. 우리는 서로 호감이 있었음에도 ‘나를 좋아할 리 없어.’라는 마음을 나란히 품고 서로를 밀어내며 고무줄 당기기를 했다.
“누나는 몸 좋은 사람 좋아하지 않나.”
그는 내가 바디프로필을 찍으며 꾸준히 관리를 하는 모습과 과거에 만난 운동하는 남자 이야기를 종종 하곤 했다. 내가 우리 사이를 고민하느라 방어적으로 그를 밀어내는 듯하면 ‘누나는 몸 좋은 남자 좋아하지. 날 좋아할 리 없어. 나 갖긴 싫고 남 주긴 아까운 거야?’라며 오해하고 상처받아 합리화를 했다. 배 나온 남자 처음 좋아한다는 말에 삐져서 입을 삐죽 내밀고 툴툴댔다. 난 그가 진짜로 귀여워서 했던 말인데.
“넌 수수하고 모범생 같은 외모 좋아하지 않니. 넌 나한테 결혼하기 좋은 사람은 아니라며.”
그가 과거에 좋아했던 착하게 생기고 공부 잘하고 얌전하던 친구를 떠올렸다. 그의 친구가 나를 좋아했다고 하지만 그가 보기에 누나가 결혼할 만큼 좋은 사람이냐며 핀잔주듯 말했다. 그가 어릴 적 좋아하던 여자 이야기를 하면 우리의 추억을 떠올린 것뿐인데도 왜 굳이 내 앞에서 그 여자를 언급하냐며 삐뚤어진 마음으로 더 뾰족하게 대했다.
4.
그는 나에게 대지가 되어주었기에 그의 축축하고 차가운 대지에 뿌리를 내려 따뜻함을 선물하고 꽃을 피워주고 싶었다. 나의 열기로 그의 차가운 동굴 속 우울함을 열기로 녹여주고 그는 나를 척박한 현실에서 벗어나 웃게 해 줬다. 우리 사이엔 묘한 가족애가 있었다. 그는 나를 여자친구이자 따뜻한 엄마처럼, 나는 그를 남자친구이자 귀여운 아들처럼 생각했다. 그만큼 서로에 대한 믿음이 커서 믿음이 깨진 순간 배신감을 크게 느끼며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다.
“누나. 날 좋다고 하면서 연락도 잘 안 하고. 나한테 실망했어? 그래서 그때 나 버렸구나.”
“내가 널 얼마나 믿었는데. 믿음의 끝은 버림받은 거네.”
나는 10년이 넘는 우리의 서사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나눈 추억이 두터워 어떤 상황에서든 그를 믿었다. 예기치 못한 큰 갈등이 있던 순간 그는 나에게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며 모진 말을 내뱉었다.
“누나는 우리가 오래 알았는데 어떻게 그러냐고 하는데 난 그게 중요하지 않거든? 오래 알고 지낸 거랑은 상관이 없다고.“
아슬아슬하게 세워놓은 모레성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침몰한 마음은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한참 뒤 눈물을 흘리며 사과했다.
“그때 내가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미안해. 내가 또 상처 줬을까 걱정했어.”
우여곡절을 겪고도 우리는 다시 만났다. 침몰한 마음을 다시 잡아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그가 나에게 업무적으로 도움을 요청했을 때 알람도 맞추지 않고 잠이 들어 그를 돕지 못한 순간이 있었다. 내가 그의 부탁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듯 말하는 모습에 그는 상처를 받았다. 내가 예전과 같지 않다고 말하며 홀로 남겨진 기분에 서러웠다고 말했다.
“안심해서 변한 거야? 누나가 힘들 때 내가 혼자 남겨둬서 나한테 벌주는 것 같아. 혼자 남겨진 기분이 되게 서러웠어.”
서러운 마음을 다독여주며 지난날들이 떠올라 아쉬웠다. 그때도 서로에 대한 기대가 만든 편견을 내려놓고 서운한 점을 털어놓고 말했더라면 더 일찍 오해가 아닌 사랑을 할 수 있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