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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홍석 Jan 21. 2019

[우리말이야기] 말모이 운동의 시작

가리지날 시리즈

[알아두면 쓸데 있는 유쾌한 상식사전] 말모이 운동의 시작

 

여러분의 답장으로 먹고 사는 조홍석입니다.

모처럼 최근 극장가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국내 영화가 한 편 있지요. <말모이>...

작년에 <말모이>라는 영화가 개봉 준비중이라는 얘길 들었을 때, 처음엔 경마 이야기인줄  알았습니다.

말을 키우는 사람들의 애환을 다룬... =.=

 

하지만 알고보니 일제 말기 조선어학회 사건을 다룬 이야기더군요.

문맹이던 자가 입에 풀칠하려고 조선어학회에 들어갔다가 우리말의 소중함을 깨닫고 이를 지키고자 노력한다는

줄거리의 영화, 어떻게 전개할 지 대략 예상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시건 안보시건 상관없이 한글에 대한 말모이 이전 역사를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1446년, 우리 말을 제대로 표현할 고유 문자가 없던 상황을 타개하고자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28글자를 만드셨지만 이후 확산 과정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당대에는 과거시험에 적용했지만 이후 양반층의 반발로 인해 성종 이후로는 다시 천시하여 한자는 진서(眞書)라 부른 반면, 훈민정음은 언문(諺文),언서(諺書),언어(諺語),반절(反切),암클,아햇글,중글 등으로 비하했지요. =.=


이처럼 조선 후기 내내 한글은 여성들과 평민 계층에서만 쓰이다가 구한말이 되면서 1887년 성서 번역본

<예수성교젼서> 발간에 이어 1894년 대한제국 선포 당시 고종 황제가 드디어 한글을 국가문자(國家文字)로

선포하고 줄여서 국문(國文)으로 부르게 됩니다.


이에 따라 1896년 최초의 순한글신문 <독립신문>이 발간되고, 독립신문의 교열 담당도 했던 주시경 선생이

한글 이론과 표기법의 통일을 절감하며 1905년 <국어문법>을 펴내게 됩니다.

 또한 정부에서도 교과서를 한글로 발간하고 국문연구소를 설치해1909년 <국문연구의정안> 보고서를 발표하며

맞춤법 통일을 시도하는 등 제도적으로도 한글을 널리 보급하고자 노력을 기울입니다.

 

하지만 1910년 대한제국이 망하고 일본 치하에 들어가면서 우리말과 글을 위기에 처하게 되지만

수많은 선각자들이 여러 어려움을 헤쳐 나가게 됩니다.


1912년 조선총독부는 대한제국 시절 국문이라 불리던 한글을'언문'이라고 다시 격하하면서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을 발표합니다.

'경성(서울)어를 표준으로 한다 / 표기법은 표음주의(발음나는 대로 표기)에 의한다 / 한자음을 언문으로 표기하는 경우 종래의 철자법을 쓴다 / 아래아는 폐기한다'는 이 원칙은 식민지 교육의 편의를 위해 만든 것이었지요.

가끔 인터넷에서 일본인들이 이 <언문철자법> 발표를 거론하며 조선에서도 버림받은 한글을 되살려 준 게

일본 지배 덕분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미 대한제국 시절 한글을 국가 표준으로 정하고 맞춤법을 통일하던

과정에서 중단되었단 역사적 진실을 외면하는 겁니다. 이를 모르는 일부 우리나라 사람들도 그게 사실인가

하면서 찜찜하게 생각하기도 하는데 이는 가리지날 정보입니다.

 

(주시경 선생)

 

이 같은 일제의 언문 격하와 이치에 맞지 않는 표기법에 반발한 주시경 선생은 1913년 <아이들 보이>라는

잡지에서 처음으로 우리 글자를 '한글'이라 부르자고 제안하시지만 그 다음해 불과 39세 나이에 운명하시죠... T.T

이후 주시경 선생의 제자인 장지영, 김윤경, 최현배 선생 등이 1921년 민간 학술단체 조선어학회를 창립합니다.

 

(잡지 <한글>)

 

그후 조선어학회는 훈민정음 반포 8회갑(480년)되는 1926년 음력9월 29일을 반포기념일로 정해 '가갸날'이라고 부른 뒤 1927년 2월부터 <한글> 잡지를 발간하고 1928년에는 훈민정음 반포기념일을 '한글날'로 고쳐 부르면서 우리 글 명칭으로 한글이 정착됩니다.

뒤이어 1929년 10월, 안재홍, 조만식, 유억겸, 백낙준, 이광수, 주요한, 이극로, 정인보, 이희승 등 108명의 각계 인사가 모여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를 만들어 <조선어사전> 편찬 작업에 착수하고,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하는 등 우리말 지키기에 노력을 기울이지만

일제는 계속 탄압을 하게 되지요...T.T

 

사전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표기법 통일이 중요했기에,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은 국어학자간 치열한 논쟁 끝에 탄생했습니다.

당시 우리말 연구학회는 조선어학회 말고도 1931년 발족한 조선어학연구회란 단체도 있었습니다.

조선어학회는 <한글> 잡지를 발간하면서 표기법은 뜻에 따라 쓰는 표의주의를 주장했습니다.

반면 조선어학연구회는 박승빈, 정규창, 백남규 선생 등이 주축이었는데 <正音> 잡지를 발간하면서

주시경 학파의 표의주의를 비판하며 소리 나는대로 표기하는 표음주의를 주장했다고 합니다.

(옛 동아일보 본사, 현재 일민미술관)


이에 동아일보사가 1932년 11월 7일부터 3일간 <조선어 표기법 통일안에 대한 범국민 공청회>를 개최하기에

이릅니다. 당시 일제 지배 시기임에도 이 공청회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 두 학회의 공방을 지켜보게 되니...

잠시 그 날의 분위기를 권투 중계 형태로 전달해 보겠습니다.

 

"빰빠라빰빠라빰빠~ 빰빠라빰빠빰빠~

친애하는 조선인 여러분 강녕하신지요? 여기는 광화문통(지금의 세종로) 동아일보사에 마련된 특설 링,

아니 특설 강연장입니다.
오늘부터 조선어학회와 조선어학연구회 소속 학자들이 바르고 고운 조선 말 표기를 위한 설전을 사흘간 전개한다고 합니다.

 

첫째날 주제는 바로~ 된소리 표기법 공방 되겠습니다.

홍색 코너~ 조선어학회 신명균 선생 등장합니다.

청색 코너~ 조선어학연구회 박승빈 선생 등장합니다.

이야, 오늘 특설 강연장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네요~ 뜨거운 열기가 여기까지 느껴집니다.

조선어학회 신명균 선생, 된소리는 'ㄲ,ㄸ,ㅆ,ㅃ,ㅉ'등 쌍자음으로 표기해야 한다고 강렬하게 선방을 날립니다!

쓰기 편한 실용주의 전략을 선보이는 군요.

하지만 노련한 조선어학연구회 박승빈 선생, 쓰윽 맹공을 피하며... '거 무슨 소리요? 세종대왕님이 훈민정음을

만드실 때 우리말 된소리는  'ㅅ병합'방식인 'ᄭ,ᄯ,ᄲ,ᄶ' 로 표기했으니 원조 표기법으로 가야하느니~'라며

반격합니다~

아. 참석한 청중들~ '세종대왕님이 진리'라며 박승빈 선생을 응원하네요~

첫날 경기 결과, 세종대왕님이 정한 대로 하자는 'ㅅ병합' 주장이 판정승을 거둡니다~"

이처럼 첫날 강연에서는 조선어학연구회 'ㅅ병합' 된소리 표기 방식이 더 선호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둘째날 공청회가 이어집니다.

"강녕하신지요? 친애하는 조선인 여러분.
둘째날 공청회가 시작됩니다.
오늘의 주제는 받침 표기법입니다.

홍색 코너~ 조선어학회 이희승 선생 등장합니다.

청색 코너~ 조선어학연구회 정규창 선생 등장합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수많은 인파가 이 공청회를 가득 메웠네요~

선공에 나선 조선어학회 이희승 선생, 즉 '값이' 등과 같이 어간과 어미를 구분해 겹받침과 ㅎ받침을

쓰자고 주장합니다~

반격에 나선 조선어학연구회 정규창 선생, 왜 어렵게 그렇게 쓰냐? '갑시'와 같이 발음나는 대로 표기하자,

겹받침은 불편하다고 주장하면서 ㅎ발음은 거의 들리지 않으니 받침에 쓸 필요가 없다고 반박하네요~

앗, 이희승 선생이 벌떡 일어납니다. 품에서 뭔가를 꺼내는데요... 엇 저건 창호지 아닙니까? 뭘 하려는 걸까요?

이희승 선생, 'ㅎ받침이 왜 필요없냐? 실험 좀 해봐라~' 일갈하면서 창호지를 입에 대어 '가,까,카' 발음을 냅니다.

아~ 정말 각 발음 별로 종이가 떨리는 모습이 다르군요! 원투 펀치~ 상대방 정신을 못차립니다!

참석한 관중들 기립박수를 보냅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만남, ㅎ받침이 존재해야 함을 증명해 내는군요.

그렇습니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과정이 바로 과학적 탐구정신 아니겠습니까? 오늘 공청회는 이 것으로 끝~"

둘째날 공청회는 ㅎ받침이 존재해야 함을 증명한 이희승 선생의 주장이 승리를 거두니 두 학회는 1승 1패가

되었다지요.

 

그리고 마지막 셋째날 공청회가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조선 백성 여러분 강녕하신지요? 오늘 드디어 마지막 공청회가 시작됩니다.

표기법의 대원칙을 정하는 가장 핵심 이슈인 어미 활용 문제가 오늘의 주제입니다.

현재 두 학회의 점수는 1:1 마지막 발표자의 능력에 따라 조선어 표기법의 원칙이 결정나게 됩니다!

이틀간 열띤 토론에 감명 받은 인파로 문 밖 복도까지 꽉 들어찼습니다~

홍색 코너~ 조선어학회 최현배 선생 등장합니다.

청색 코너~ 조선어학연구회 박승배 선생 등장합니다.

마지막 주자로 나선 조선어학회 최현배 선생, 주시경 선생의 수제자죠. 조선어학회 대표 선수라 할 만 합니다.

아, 최현배 선생! 어간의 원형을 밝혀 적는 '표의주의'를 주장하며 묵직한 공격을 날립니다.

반격에 나선 조선어학연구회 박승배 선생, 글자 사용의 편리성을 강조하며 발음 나는 대로 적는 '표음주의'를 주장하며 가볍게 되받아 칩니다

앗, 최현배 선생, 분연히 일어납니다! "발음나는 대로 적는 것이 편하기는 하지요. 그러나! 왜놈들이 권장하는

것처럼 발음나는 대로 적게 하면 사람마다 지역마다 다 달리 적을 것인데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정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오? 우리 말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서는 어간의 뜻을 밝혀 적어야 언제가 다시 우리 말을

자유롭게 쓰게 될 우리 후손들에게 혼란이 일어나지 않소."

아, 자리에 모인 모든 관중들 환호성과 함께 열렬한 박수로 최현배 선생을 응원하네요~

조선어학회, 첫날의 부진을 씻고 대 역전승을 거둡니다~!

이상 동아일보 특설 강연회장 중계 방송을 모두 마칩니다~"

 

쓰는 사람마다 표기법이 달랐기에 맞춤법 통일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던 관중들은 엄격한 문법적 관점에서 우리말 보존의 중요성을 강조한 최현배 선생의 주장에 적극 찬성하게 됩니다. 이로써 조선어학회의

대역전승으로 끝난 1932년 사흘간의 대토론회에서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표기법 원칙이 확정되고 1933년

드디어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발표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표기 원칙이 정해지면서 학회 차원에서 전국

학생들과 지원자들의 도움을 받아 전국 방방곡곡의 말을 모아 표준어 사전을 편찬하는 '말모이'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됩니다.

 

이 얼마나 가슴 뭉클한 이야기입니까?

 

어려운 이야기를 재미있게 전달하고자 스포츠 중계 방송처럼 소개했지만 제가 예전 이 공청회 이야기를 처음

접하고는 두 눈이 촉촉히 젖었습니다. 80여년 전 이런 분들이 계셨기에 우리 말과 글이 제대로 지켜진 것입니다.

비록 양측이 첨예하게 대립했지만 두 학회 모두 우리 말과 글을 사랑하신 애국자들이셨습니다

 

(1935년 조선어학회 회원들 단체 사진)

 

하지만 이 같은 우리말 보존을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미 해외로부터 새로운 문물이 쏟아져 들어오던 시기여서 일본어, 영어 등 외국어의 영향이 증가하고 발음 체계에서는 과거에는 명확히 구분되던 ㅔ/ㅐ, ㅟ/ㅚ 등의

모음 발음에 혼돈이 오기 시작합니다.
게다가 1938년부터 우리말 사용을 금지 당하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습니다.

일제는 더 나아가 그동안 눈엣가시였던 조선어학회를 와해하기 위해 1942년 10월 이른 바 '조선어학회 사건'을 만들어 냅니다.

당시 함흥영생고등여학교 박영옥 학생이 친구들과 통학 기차 안에서 우리말로 대화하던 것을 조선인 경찰관

야스다(원래 이름은 안정묵)에게 적발되어 경찰서로 끌려갔고, 민족주의 감화를 준 배후 인물이 조선어학회 회원인 정태진이라는 자백을 받아내고는 '민족주의 단체로서 독립운동을 획책했다'는 이유로 최현배 선생 등 주요 인사 33명을 체포해 학회를 해산시켰고 수감생활 도중 이윤재, 한징 선생은 감옥에서 순국하시게 됩니다. T.T

 

(외솔 최현배 선생)


다행히 해방이 되면서 최현배 선생은 8월 17일 함흥 감옥에서 풀려나자마자 서울로 복귀해 출소 3일만에 조선어학회(1949년 한글학회로 개명) 재건 회의를 열어 중단된 한글 사전 발간과 해방된 조국에서 사용할 국어 교과서 편찬을 시작합니다.
게다가 조선어학회 사건 당시 압수당했던 2만 6천여 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자료들이 1945년 9월 8일 기적과도 같이 서울역 창고에서 발견되어 다시 편집에 박차를 가해 1947년 10월 9일 <큰사전> 1권이, 1949년 5월에 2권이 나오게 됩니다.

 

또한 해방 때까지 수년간 일본어만 사용하게 한 지라 한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성인이나 학생이 대다수였기에

최현배 선생은 미군정 산하 교육위원회 교과서편찬분과위원장으로서 교과서 편찬의 기본 방향으로

'모든 교과서는 한글로 하며 한자는 필요한 경우에만 괄호 속에 넣으며 가로쓰기를 원칙으로 한다'고 정한 후.

<한글 첫걸음> 등 초중등 교과서 50여종을 집필하면서 수학, 과학 영역까지 새로운 한글 단어들을 창제하십니다.


도시락, 김밥, 통조림,건널목,책꽂이, 짝수,홀수,덧셈,뺄셈,곱셈,나눗셈,지름,반지름,반올림,
꽃잎,암술,수술 등...

그저 놀라울 뿐이에요. O.O


한글 전용과 가로쓰기 원칙은 이후 1948년 10월 국회를 통과해'한글 전용법'으로 공포되어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출간물의 기본이 됩니다.


1926년부터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 전신)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글 보급에 앞장서다가 흥업구락부 사건과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연이어 투옥당하는 고초를 겪은 외솔 최현배 선생의 이 같은 확고한 한글 전용과 표의주의  원칙은 연세대학교가 국문학 연구를 선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연세대학교 한글탑)


현재까지도 연세대학교는 일어일문학과를 개설하지 않고 있으며 학보<연세춘추>는 순한글 신문으로

발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최현배 교수가 강의하시던 인문관 건물은 '외솔관'이라고 새로 이름 짓고,

신촌캠퍼스 중앙도서관 앞에 한글탑을 세우는 등 그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후 민간은 물론 정부에서도 해방 당시의 뜨거운 열정을 잊고 굳이 한자를 사용하고, 수많은 외국어를 무비판적으로 차용하고 있습니다.
당시는 물론이고 얼마 전까지도 신문 및 주요 학술지는 한자 표기가 다수였고, 정부조차 1970년대 버스 회수권을 도입하면서 굳이 '토큰'이라고 영어 명칭으로 발표해 사용하게 하고, 1980년대 들어서는 인구 총조사를 '인구센서스'라고 부르더니,

최근에는 동사무소는 '주민센터'로 바꾸고 각종 정책 발표시'어젠다'와 '타임테이블', '애즈이즈(As-Is)'와 '투비(To-Be)' 등 외래어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초대 국회에서 한글 전용법을 통과시켰던 국회도 여전히 마크부터 여기저기 한자 투성이...

많은 공기업들 역시 정체불명의 영어 약어로 아예 기관명칭을 바꾸고 있지요...

 

이처럼 과거 삼국시대 한자 도입과 함께 수많은 고유어가 잊혀져60% 이상 한자어로 교체되더니

우리 시대에 또다시 우리 말이 크게 흔들리는 시대를 지금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한글을 지키고자 노력한 여러 선각자들을 생각한다면 다시 한번 무분별한 한자, 외국어 사용은 고민해보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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