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저 오늘 학교 못 가겠어요."
감기 걸린 1호가 아침에 일어나며 안 좋은 얼굴로 얘기한다.
"1교시만이라도 하고 오면 안 돼?"
"그냥 쉬면 안 될까요?"
아프다는데 가서 공부하고 오랄 수도 없고 또 빠지려니 그것도 마땅치 않고 이래저래 마음에 안 드는 아침 시간이었다.
나는 선생님께 결석을 한다고 말씀드린 뒤 1호에게 들어가 좀 쉬라고 했다. 2호를 시작으로 지금 우리 집은 감기로 몸살을 앓고 있다.
2호는 거의 다 나아 가는데 나한테 옮겼는지 엊저녁부터 내 목이 심상치 않다. 오후 출근인 남편을 깨워 병원에 총출동을 하였다.
코로나 검사는 다행히 모두 음성인지라 감기약만 받아 가지고 나왔다. 나온 김에 곰탕이라도 한 그릇 먹고 가자 해서 그래도 좀 유명하다는 집에 찾아가 먹었다.
남편은 살뜰히 아들을 챙겼다. 그릇도 밀어주고 고기도 챙겨주며 이렇게 먹어라 저렇게 먹어라 하며 영락없는 우리네 아버지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얼마나 흐뭇하던지.
오래전 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아내와 사별 후 하나 있는 아들 보살피기 위해 직장도 그만두고 아들 뒷바라지하는 내용이었다.
아내를 얼마나 사랑했던지 재혼 생각은 일도 없었다. 여느 아줌마들과 똑같이 어울리며 수영장이며 학원이며 도시락 싸서 픽업을 다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모성만큼이나 부성 또한 이에 못지않다. 그러나 우리의 가부장적인 정서는 늘 모성에 집중되어 있으며 사회가 또 그것을 종용하기도 한다. 엄마의 희생이 당연한 것인 양.
근데 내 입맛이 변한 건지 곰탕집 맛이 변한 건지 옛날 맛이 아니다. 곰탕집은 본디 3대가 해도 맛이 변화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깍두기도 맛있어야 하고 곰탕집의 김치는 더 맛나야 한다. 이 김치는 곰탕집마다 다 특색이 있는데 비밀 레시피를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죽을 때까지는 며느리도 모르는 비법이어야 한다. 그래야 죽을 때까지 자식이 효도하지 않겠어?
"자기야 국물이 좀 싱거워진 것 같지 않아? 맛이 좀 변한 것 같아."
"뭐, 비슷한데. 자기 입맛이 변한 거지."
나도 먹을 만치 먹은 나이인지라 내 입맛이 변했을 수도 있겠다 하는 말에 동의를 안 할 수가 없다. 사람이 늙으면 입맛도 변하고 손맛도 변한다. 우리 어머니들 보면 예전 손맛은 없고 음식 맛도 달라지기 일쑤다. 고집이 세져 음식 맛도 달라지는 걸까?
내일 아침은 양배추를 쪄야겠다. 양배추야 암만 나이 먹어도 변하지 않을 맛이니 부담이 없다. 입맛 없는 아침에 뜨뜬한 밥에 쌈으로 싸서 입에 쏙쏙 넣어주면 참새 새끼들처럼 잘도 받아먹고 학교에 간다. 이 아이들도 나중에 어른이 되면 변해버린 엄마의 손맛을 기억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