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바다를 피해갈 줄도 알아야지

by rabyell

새로운 이야기에 앞서, 제 이야기를 먼저 해볼까 합니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MBTI는 ISTJ, 혈액형은 O형, 사주는 일주를 포함해 6개의 흙(土)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런 소개라면 한국인의 대다수는 머릿속에 어떤 인물을 그려낼 수 있을 겁니다. 네. 반박의 여지없이 그 모습이 저의 모습입니다.


좀 더 풀어서 설명하자면 K-장녀의 표본이랄까요? 타고난 잔소리꾼에 본인이 맞다고 생각하는 건 끝까지 지켜내는 고집불통의 인간입니다.


때문인지 다방면에서, 어쩌면 모든 일에 있어서 약간의 강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면 제 주변인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들이 보기에도 대-단하다 싶었겠죠. 어찌 되었든 규칙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사람, 바로 저예요.




저는 이런 제 모습이 그리 싫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집단 안에서 나의 역할이 커질수록, 책임져야 할 일이 많아질수록 저의 얕고 넓은 강박은 제 앞길을 막아섰습니다. 분명 발목높이의 개울이었던 것이 가슴높이의 큰 바닷물이 되어 그 물살을 거슬러 앞으로 나아가는 게 힘들어지게 되었어요.


브런치가 대표적이죠. 하고 싶은 말은 언제나 많은데, 시리즈물로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 제목의 양식과 글의 구성이 언제나 통일성이 있어야 한다는 강박, 언제나 같은 요일 같은 시간에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 이런 것들이 역설적이게도 글쓰기를 이어가지 못하게 했어요.


제 오랜 취미인 베이킹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베이킹은 변수가 워낙 많기에, 원하는 결과물이 나오려면 정말 많은 시간과 체력을 투자해야 했어요. 같은 메뉴를 3번 4번씩 만드는 일도 흔했습니다. 하지만 퇴근하고 홈베이킹을 하는 저에게 그 시간과 체력을 쓰는 건 사치에 가까웠죠.




요즘 유튜브를 보면서 '이렇게 얼렁뚱땅이지만 맛은 좋은걸?'이라고 말하는 요리채널이 늘어났다고 느낍니다. 저는 누군가에게 숨기고 싶었던 모습이었는데, 이런 모습까지도 즐기면 콘텐츠가 되는구나 싶어요.


그래서 저도 조금 내려놓아 보기로 했어요. 지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다음 주는 레몬입니다. 다른 이의 레시피로 3일이 걸려 만든 타르트예요. 작게 스포하자면...

처참한 모습입니다. 크크.




저는 홈베이킹을 오래 했습니다. 시작점이 애매하지만 오뚜기 팬케이크 가루도 홈베이킹으로 쳐준다면, 8살이 기준이 될 겁니다. 그럼 벌써 25년 차네요. 제 동반자와도 같은 홈베이킹은 이제는 정말 취미로 즐겨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다가가는 방법을 바꿔보기로 했어요.


이 이야기는 강박증을 이겨낸다거나 여러분께 좋은 정보를 드린다거나 하는 대단한 글은 아닙니다. 그냥 얼렁뚱땅 어리둥절 즐겁고 싶은 사람의 기록일 거예요. (참, 저는 기록 강박도 약하게 있어요. 사진은 연월로 나눠 드라이브에 저장하고, 블로그는 날짜별로 기록합니다. 물론 귀찮아서 밀리기 일쑤고요.) 기록이라곤 해도 통화할 때 한 손으로 끄적이는 메모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니 여러분도 부담 없이 잠깐 들렀다 가시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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