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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쿤투어 Jul 10. 2017

당신이 마신 맥주, 사실은 맥주가 아닐지도

★ 싸다고 집어 들지 말라, 맥주가 아닐지도 모른다


최근 수년 한국에서도 다양한 수입 맥주를 접할 수 있게 되었고 수제 맥주도 붐이라 할 만큼 늘고는 있지만 오비, 하이트진로, 롯데 등 소위 국내 '메이저 맥주'사에서 나오는 맥주 종류는 여전히 손에 꼽을 정도다.

(2016년 말 기준 업계 추정 점유율 오비 65%, 하이트진로 31%, 롯데 4%)


이와 달리 일본에서는 4대 맥주사(아사히, 기린, 산토리, 삿포로)에서 수십 종의 맥주를 판매하는 데다가 해마다 신제품, 기간 한정 제품을 쏟아내고 있다.

게다가 가격도 비싸지 않으니, 밤에 맥주나 한 캔 할까 하며 숙소 근처 슈퍼나 편의점에 갔다가 너무나도 많은 맥주를 앞에 두고 대체 뭘 마셔야 하나 행복한 고민을 한 경험이 다들 한 두 번은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200엔대 맥주들 속에 100엔대 맥주가 눈에 띈다.

이 건 왜 이렇게 싼 걸까?

싸면 좋은 거지란 생각에 골라 마셨다면, 사실은 '맥주'를 마신 게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제는 많은 분들이 대략적으로나마 차이를 알고 있으리라 생각되지만) 일본에는 맥주와 발포주, 제3의 맥주(혹은 신(新) 장르)가 있고 가격이 싼 맥주는 사실 맥주가 아닌 발포주나 제3의 맥주일 가능성이 높다.

 

어떻게 구분하냐고?

캔의 하단을 보면 알 수 있다.


이게 진짜 맥주. 비루(ビ-ル)라고 적혀 있다.
나마비루(生ビ-ル) 역시 맥주.
다음으로 발포주(発泡酒).
제3의 맥주에는 2종류가 있다. 먼저 리쿼(발포성).
기타 양조주(발포성) 역시 제3의 맥주.

다시 정리하면

맥주: ビール, 生ビール

발포주: 発泡酒

제3의 맥주: リキュール(発泡性), その他の醸造酒(発泡性)


★ 발포주 vs 제3의 맥주(新장르)


이렇게 맥주의 종류가 많아진 이유, 즉 발포주와 제3의 맥주를 만들어낸 이유는 뭘까?


우선 맥주 순수령 얘기부터.

오래전 한국의 맥주 광고에도 등장한 바 있는데 독일에는 맥주 순수령이 있다.

맥주의 맛과 품질을 위해 맥아, 홉, 물 이외에는 쓰지 못하게 한 일종의 법령(물론 효모는 들어간다)으로 독일에서는 아직도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지만 그 외 지역에서는 사실상 지켜지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인기 맥주인 벨기에의 호가든은 밀 맥주다.)

이러한 맥주 순수령을 지키지 않는 대표적인 국가가 일본이며 일본 맥주 가격의 차이는 바로 원료의 차이, 그리고 그로 인한 주세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일본 주세법에 따르면 맥주에는 맥아, 홉 외에 부원료로 쌀, 옥수수, 전분, 캐러멜(착색료) 등을 넣을 수 있고 물을 제외한 전체 원료 중 맥아의 비율이 50%를 넘는 것에 한해 맥주로 분류가 된다.

문제는 이렇게 맥아의 비율이 50%가 넘을 경우 세금이 소매가격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게 된다는 점이다.

 

값싼 수입 맥주가 쏟아져 들어오고 업체 간의 가격 경쟁이 심화되는데 원가를 낮출 방법이 없게 되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맥주 회사들은 과감한 발상의 전환을 시도한다.

즉 맥주로 인정받지 못해도 좋으니 맥아의 비율을 낮춰서 세금도 줄이고 맥아를 다른 저렴한 원료로 대체하여 제조 원가도 낮추기로 한 것이다.


※ 2006년 5월 개정된 주세법에 따르면, 맥아의 비율이 50%가 넘을 경우 1L당 세금이 222엔인데 비해 맥아의 비율이 25% 미만일 경우 세금은 134.25엔.

이 정도 차이면 가격 경쟁력은 확보하고도 남게 되는 것이다.


발포주 판매 1위 기린 단레이 그린 라벨(淡麗グリーンラベル). (사진 출처: 기린 홈페이지)

- 발포주: 일반적으로 맥아의 비율이 25% 이하


발포주가 등장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그 전에도 중소 맥주 회사에서 발포주를 생산하기는 했지만 본격적인 발포주의 효시는 1994년에 발매된 산토리 홉스(HOPS, 발매 당시에는 주세법 기준이 달라 맥아 비율 65% 미만)였다.

 

초기에는 맥주 본래의 깊은 맛이 나지 않는다, 쌉쌀함이 부족하다는 반응도 있었지만, 여성층을 중심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하였고 버블 경제 붕괴로 주머니 사정이 가벼워진 소비자들에게 어필하면서 급성장하였다.


제3의 맥주 판매 1위 산토리 긴무기(金麦). (사진 출처: 산토리 홈페이지)

- 제3의 맥주: 발포주에 다른 증류주를 섞은 것(리쿼 발포성), 또는 맥아가 아닌 완두, 대두, 옥수수를 원료로 하여 발효한 것(기타 양조주 발포성)으로 정확히는 맥주 맛 알코올음료


2003년에 나온 삿포로 드래프트원이 최초의 제품이며, 맥주, 발포주에 이어서 나왔기 때문에 언론 매체에서 제3의 맥주라는 명칭을 붙였으나, 혼동을 피하기 위해 맥주 업체에서는 新장르라고 부르고 있다.


2016년 출하량을 보면 여전히 맥주가 51%로 1위.

그러나 제3의 맥주 35%, 발포주 14%로 소위 비(非) 맥주를 합치면 전체 시장은 양분되어 있는 상황이다.

 

★ 한국 맥주 vs. 일본 맥주


최근 한국 시장에서 수입 맥주의 기세는 대단하다.

맥주 수입액(관세청)을 보면

1999년 194만 달러,

……

2011년 5,884만 달러,

2012년 7,359만 달러,

2013년 8,996만 달러,

2014년 1억 2,268만 달러,

2015년 1억 4,168만 달러,

2016년 1억 8,158만 달러로

2011년~2016년만 보더라도 매년 25%씩 성장하고 있다.

 

이렇게 최근 한국에서도 수입 맥주 판매가 급증하면서 손쉽게 다양한 맥주를 접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일반 식당으로 한정하면 여전히 몇 안 되는 국산 맥주 중에서 '힘겹게' 골라야 하는지라 맥주 애호가로서 아쉬움이 많을 따름이다.

맛으로 승부하지 못하고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폭탄주 만들기에는 나쁘지 않아서, 싸고 시원하니까(특히 생맥주) 등이 셀링 포인트가 되는 걸 보면 답답함을 금할 수 없다.

 

이에 비해 '맥주 선진국' 일본에는 메이저 4개사의 제품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고 지비루(地ビール, local beer)라 불리는 지역 특산 맥주까지 넘쳐 나니 정말 천국과 다름없다.


※ 1994년 맥주 양조 면허 취득에 필요한 연간 최저생산량이 2,000KL → 60KL로 변경되면서 한 때 300개사 이상이 난립(?)하던 시기도 있었다고 한다.


일본 제1호 지비루는 니가타에서 생산되는 에치고 맥주(エチゴビール). (사진 출처: 에치고 맥주 홈페이지)

양국 맥주 시장이 이렇게 차이가 나는 이유 중에는 맥주 양조의 역사도 있다.

한국에서 맥주가 1930년대 일본인들에 의해 생산되기 시작, 80년이 채 안 되는 역사를 갖고 있는데 비해 일본에서는 1812년에 맥주 양조가 시작되었으니 이미 200년이 넘었다.

(일본에 맥주가 처음 전래된 것은 1613년 네덜란드 상인에 의해서였다고 한다.).

 

이토록 역사가 오래되다 보니 맥주는 일본인들의 생활에 깊게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음식점이나 술집에 가면 우선 맥주부터 시키는 습관(토리아에즈, 나마 = 우선 생맥주!)이 생겼을 정도니까.

아사히 맥주의 조사(2013년)에 따르면 주 1회 이상 맥주를 마시는 사람이 85%, 이중 거의 매일 마시는 사람이 33%가 넘는다고 하니 프랑스인들이 와인을 일상적으로 마시듯 일본인들은 맥주를 물처럼 마신다고 봐도 지나치지 않겠다.

 

연말연시, 오봉 등에는 맥주 선물세트가 팔린다. 들어는 봤나 맥주 선물세트.

★ 맥주의 종류가 많은 나라가 선진국?

 

저출산, 고령화, 불황이 계속되면서 일본의 맥주 판매량은 지속 감소 중이다.

메이저 4사에 오리온 맥주를 포함한 5개사의 출하량(맥주+발포주+제3의 맥주)을 보면 2016년 4억 1,476만 상자(전년비 2.4%↓, 1 상자=큰 병 20개)로 12년 연속 과거 최저치를 경신하고 있다.

 

살아남기 위한 부단한 경쟁이 계속되면서 맥주 회사들은 다양한 신제품 생산과 더불어 저렴한 발포주와 제3의 맥주 판매에 힘을 쏟고 있다.

하지만 2003년 제3의 맥주가 등장한 이후 처음으로 맥주뿐만 아니라 발포주, 제3의 맥주까지 모두 마이너스 성장했다고 하니 확실히 심각한 위기 상황이긴 하다.

단순히 싼 제품(발포주, 제3의 맥주)으로 옮겨간 게 아니라 '맥주류'의 소비 자체가 줄고 있는 거니까.


업체 간에 피 튀기는 경쟁이 일어날지언정 마시는 사람 입장에서는 새롭고 저렴한 맥주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걸 마다할 이유가 없다.


선진국이냐 개발 도상국이냐 저개발국이냐를 가늠하는 데는 수많은 기준이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기준은 소비자의 선택의 폭이 얼마나 넓은가이다.

매끼가 걱정이라 맥주는 꿈도 꾸기 어려운 상황을 지나 맥주쯤이야 큰 부담 없이 마실 수 있는 단계를 거쳐 각자 자신의 취향과 기호에 따라 마음대로 골라 마실 수 있는 수준에 접어들어야 비로소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섰다고 말할 수 있다.


어디까지나 내 기준이고 비단 맥주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컵라면의 원조 일본에서 해마다 새로 출시되는 제품 수가 몇 개인지 아는가?

놀라지 마시라.

무려 600개다.

 

모든 신이 한결 같이 검은색 양복을 입고 다니는 몰개성의 나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개인의 취향과 기호가 존중되는 나라 일본.

GDP나 외환 보유고의 차이가 아닌 이런 일상생활의 작은 부분에서 일본과의 격차를 절감한다.

경제 지표가 아닌 생활수준에서 일본을 따라잡을 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해 본다.


※ 2016년 기준 업체별 시장 점유율은 다음과 같다.

아사히 39.0%,

기린 32.4%,

산토리 15.7%,

삿포로 12.0%,

오리온 0.9%.

(오리온을 통계에 포함시켜야 하는지는 의문. 빼면 오키나와 현민들의 반발하려나.)


※  일본 정부는 2020~2026년 3차에 걸쳐 주세를 변경하기로 했다.

기존 350ml 기준 맥주 77엔, 발포주 47엔, 제3의 맥주 28엔이던 주세가 모두 54.25엔으로 통일된다.

이에 따라 맥주 가격은 내려가고 발포주와 제3의 맥주 가격은 오를 전망.


봄이면 벚꽃이 곱게 그려진 스페셜 패키지가 발매된다.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 하나둘 모으다 보니 어느덧 300개 가까이 모였다. (사진 출처: 아사히 맥주 홈페이지)

 

2016년 4월 발생한 구마모토 지진으로 무너진 '구마모토 성 복구 응원 캔'. 캔당 10엔을 기부한다. (사진 출처: 삿포로 맥주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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