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남부 가고시마현에 치란 특공 평화회관(知覧特攻平和会館)이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자살 공격(가미카제 특공대)을 위한 비행사를 양성하던 학교였고 이후에는 유물과 관련 자료를 전시하는 기념관이 된 곳으로 7년 전인 2010년 5월에 갔지만 광복절을 맞아 기억을 더듬어 글을 써 본다.
★ 신이 일으키는 바람, 가미카제(神風)
우리에게도 익숙한 단어인 '가미카제'는 원래는 '신이 일으키는 바람'이란 뜻으로 1274년과 1281년 여몽(고려+몽골) 연합군의 일본 원정 시, 태풍과 폭풍우로 인하여 정벌에 실패했던 데서 유래한다.
신이 바람을 일으켜 보호해 주었다, 그러니 '일본은 신의 나라'라는 그릇된 믿음은 일본을 중심으로 동아시아가 함께 번영하자는 이른바 '대동아 공영권(大東亜共栄圏)' 개념과 결합되어 끝내 태평양 전쟁 도발과 자살 특공대 공격이라는 비극적인 결과를 낳기에 이르렀다.
(거슬러 올라가면 정한론(征韓論), 식민 지배와도 맥이 닿겠지만 대동아 공영권이란 개념 자체는 태평양 전쟁이 한 해 전인 1940년부터 공식적으로 등장한다.)
'가미카제' 공격은 폭탄이 가득 실린 비행기로 연합군 함대에 돌진하는, (폭격이 아닌) 동체 자체의 충돌 공격을 말한다.
이런 공격이 어느 정도의 효과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생각과 달리 공격력 자체는 낮은 편이었기 때문에 주요 공격 대상이었던 항공모함을 놓고 보면 단 1척도 격침시키지 못했다고 한다.
(정규 항모 이외의 호위 항모는 3척 격침.)
미국과의 현격한 전력 차를 절감한 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겠지만 실제의 전과(戰果)는 미미했던 셈이다.
전세를 뒤집을 수 있다는 판단보다는 일본의 패색이 짙었던 시점에 조금이나마 연합군의 공포감을 조성하는 한편
국민을 더욱 사지(死地)로 몰아넣기 위한, 예를 들면 '1억 총 옥쇄(1億総玉砕)' 같은 정신교육 수단으로써의 역할이 더 컸다고 하겠다.
★ 작은 마을 치란에 찾아온 비극
가고시마현의 중심 도시 가고시마(鹿児島)시에서 남쪽으로 1시간여를 달리면 태평양 전쟁 당시 비행 학교와 가미카제 특공대의 기지가 있던 작은 마을 치란(知覽)이 나온다.
차(茶) 산지로 유명하고 260여 년 전의 무가(武家) 저택이 그대로 남아 있어 '사츠마(가고시마의 옛 이름)의 작은 교토'로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마을이다.
평화로운 치란에 어둠이 드리운 건 1942년.
대일본제국 육군 타치아라이(大刀洗) 비행학교의 분교가 개설되면서 치란 특공부대의 역사가 시작된다.
이후 소년비행병, 학도병의 특별 조종 훈련장으로 쓰이다가 전황이 긴박하게 돌아감에 따라 (오키나와를 제외한) 일본 본토 최남단 특공기지로 전환, 1945년 종전 때까지 1,036명의 젊음이 이곳에서 죽음을 강요받는다.
전쟁이 끝난 후 30년이 지난 1975년 특공유품관이 문을 열었고 관광객이 늘어나자 1987년 현재의 이름인 치란 특공평화회관으로 확장 개관하였다.
도쿄에서부터라면 직선거리로 1,000km나 떨어져 있고, 비행기나 신칸센을 타고도 다시 기차/버스/렌터카를 타야 하는 찾아가기도 힘든 작은 마을에 지금은 매년 50만 명 이상이 방문한다.
★ 평화를 찾아볼 수 없는 평화회관
평화회관에 들어가기 앞서
우선 특공대원들의 숙소를 재현한 삼각병사(三角兵舍)를 둘러보았다.
각지에서 모여든 특공대원은 이곳에서 2, 3일간 생활한 후 출격하였다고 한다.
출격 전야, 술을 나눠 마시며 군가를 부르고, 잠들기 전 어두운 불빛 아래서 유서를 쓰면서 젊은이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2010년에는 관내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었다.)
태평양전쟁 때 실제로 사용되었던 전투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당시 일본군의 주력 전투기였던 제로센(零戦)이 인상적인데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바람이 분다>에서 제로센의 설계자인 호리코시 지로(堀越二郎)의 이야기를 그린 탓에 많이 알려졌다.
일본군 전투기 중 가장 많은 만들어진 기종(1만 대 이상)으로 사진 속 제로센은 35년 동안이나 바다에 가라앉아 있던 기체를 인양한 것이라고 한다.
※ 제로센을 개발하고 양산한 회사가 미쓰비시(三菱).
군함도의 탄광을 인수하여 운영한 회사 역시 미쓰비시다.
특공부대원의 사진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어렸는지 알 수 있다.
자신의 행동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이해나 할 수 있었을까?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국가가 그들의 죽음을 어떻게 포장하고 이용할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치란에서 출격하여 전사한 특공부대원은 총 1,036명.
그중에는 한국인 11명도 포함되어 있다.
내가 평화회관을 방문한 날, 나이가 지긋하신 단체 관광객이 있었고 (어디까지나 내 느낌이지만) 그분들은 영정을 보며 한결같이 감상에 젖어있는 표정이었다.
그분들이 '대일본제국'의 영화를 떠올리며 감상에 젖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애국심'이라는 미명 하에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죽음 뒤에 감춰진,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책임이나 죄를 반성했을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같은 사진을 보며 서로 너무나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현실.
한일 양국의 간극은 여전히 컸고 쉽게 메워지지도 않을 것 같았다.
★ 17살 청년 박동훈을 기리며...
10여 년 전 중국에서, 가미카제 특공 출격을 앞두고 '전투에 나가는 것이 너무 가슴 벅차며', '(적을) 가루내어 보여드리겠다'라는 소회를 담은 일본군의 육성 LP가 발견된 바 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박동훈(일본명 오카와 마사아키).
황민화 정책에 의해 '어디까지나 지원병'으로 전시 동원된 겨우 17살에 불과한 소년이었다.
그리고 박동훈은 지금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다.
패전(그들의 표현으로는 종전) 72년을 맞이한 올해에도 A급 전범을 분사한다거나 유족의 의사에 반(反)하여 합사된 전사자를 분사하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주변국의 반발에 더 이상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하지는 않지만 계속하여 공물을 바치고, 평화 헌법 개정과 전쟁 가능 국가화에 대한 야욕을 버리지 못하는 아베 신조 총리.
재임 기간 중 매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치란 특공 평화회관에서 흐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
소수 정치인의 일탈이 아니라 이런 사고를 가진 정치인이 널리고 널린 게 일본의 현실이다.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던 도시 히로시마나 나가사키에서도 같은 생각을 했지만 자신들의 잘못을 진정으로 반성하고 책임을 지지 않는 상황에서 '평화'를 기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완전하고 최종적인 타결'인 한일협정과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위안부 합의의 이면에서 민낯을 드러내는 일본을 보면 경제적인 배상과 함께 진심 어린 사과를 기대하는 것은 여전히 요원한 바람일 뿐이다.
수많은 질문을 가슴에 담은 채 치란 특공 평화회관을 뒤로했는데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