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스토리텔러 레이첼
May 30. 2023
떠난 기억이 돌아오는 시간이 있다. 그런 날은 웃어도 눈물이 난다. 바람처럼 불현듯, 우연히 귓가에 들려오는 노래에 마음이 녹아버린 적이 많았지만 왜 이제야 엄마도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지 가슴이 미어진다.
누구나 자신만의 애닮은 사연을 품고 살아가지만 특별히 위로받아야 할 세대가 일제강점기, 6.25 전쟁을 치렀던 분들이다. 지금은 80-90대가 된 어르신들을 만나 뵐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분단된 삼팔선으로 인해 국경에서 건너다 보일 정도로 가까운 곳에 자신을 애지중지했던 조부모를 남기고 떠난 후 평생 한이 된 분등, 꺼내 놓기 시작하면 트라우마요, 상처였던 시간. 얼마 남지 않은 이분들의 일생은 할 말 많은 인생이었다.
하지만 노래하면 그런 기억들은 그래도 견딜 만하게 다가온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은 위로가 된다. 노래는 어느새 닫힌 마음을 해체시킨다. 버리고 싶어도 끌어안고 살 수밖에 없는 시간도 있다. 그런 시간도 남들이 부르는 노랫속에서는 견딜만해진다.
1930년대에 태어나 지금 80대 90대가 된 분들의 삶은 서러움, 슬픔, 분노로 점철되었을 삶이었다. 우리 엄마도 1930년대생이다. 엄마와 헤어져 산 지 23년째다. 온라인시대 덕에 엄마와 함께 할 방법을 찾았다. 유튜브를 틀어 놓고 전화기로 엄마의 노래를 듣는 것이다. 10여 년 전 화장한 적도 노래를 부른 적도 별로 없던 엄마가 어느 단체와 함께 관광버스를 탄적이 있었다고 한다. 엄마가 노래하고 춤춘 모습을 본 동생은 충격이었다고 했고, 그 말을 듣고 '엄마도 여자였고, 한때는 틴에이저였구나. 그런데 우리는 몰랐구나. 엄마는 한번 노래도 불러보지 못하고 젊은 날을 그냥 보냈구나'라는 생각에 죄송스럽고 슬펐다. "오빠 생각, 반달, 고향의 봄, 섬집아기, 김삿갓, 고향 생각, 반달, 동백꽃 아가씨, 개나리 처녀" 등이 엄마의 마음을 담은 플레이리스트다.
다음날 오후 봉사하는 시설의 노인들께로 달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 연령대의 어르신들이라 모두 아는 노래였다. 두어 시간 함께 시간을 보낸 후 나는 녹초가 되었다. 노인들께서는 2시간이 지난 후에도 계속 노래를 부르고 싶어 했다. 특히 '김삿갓'을 유독 좋아했다. 나중에 엄마께 그 시간에 대해 말씀드리니 엄마가 한술 더 떴다. '머리에 가발 쓰고 얼굴에 분장도 하고 옛날식으로 한복'도 입고이왕 하는 것 노인들을 기쁘게 해 드리라는 것이다.
시들하고 무기력한 일상에 약간의 리듬이 들어간 것에 불과했지만 엄마는 노래로 조금은 속풀이를 한 것 같았다. 기쁨 한 스푼, 낭만 한 스푼은 젊은 세대, 중년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치매환자들은 노래시간을 좋아한다. 내가 봉사하기 위해 가는 곳에서도 그렇다. 나는 열명 가까이 되는 노인들 중에 어느 분이 기억을 잃으신 분인지 처음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다른 것은 다 잊어도 초등학교 때 어른들의 어깨너머로 들었던 노래는 치매에 걸린 노인들도 거의 기억하고 있었다
조용필의 노래는 몰라도 어린 시절 들었던 그 시절의 노래는 알고 있다니, 가사까지 읽어가며 다 따라 불렀다. 어떤 분들은 팝송도 좋아했다. 아마도 꿈 많은 소녀 시절에 팝에 심취했을 것이다. 평소 말도 없던 분들이 노래를 부르다니 그날 지나던 분들도 그 현장을 보고는 모두 놀랐다.
치매가 진행이 되어도 몸과 마음만 그럴 뿐 영은 살아있다고 생각한다. 어르신들께도 흥미롭고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그분들이 앉아서라도 할 수 있는 액티비티가 없을까? 1930년대에 나온 노래를 비롯, 마카레나라는 춤을 느린 버전으로 함께 했는데 그 시간이 가장 활기가 있다.
흔히 연로한 노인들의 일상은 그저 그러려니 하기 쉽다. 누군가 그러셨다고 한다. "아직 죽기 전까지는 살아있다"라고! 엄마는 이난영 같은 가냘픈 목소리로 노래하며 "나도 살아있었노라고, 여자였으며, 청춘이 아쉬웠던 사람이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제 떠날 시간을 준비하는 엄마와 나누는 이 시간을 어떻게 추억하지 않을 수 있을까?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들어보면 남편과 떠나간 자식에 대한 그리움이 전부다. 슬픔이 말을 걸 때에는 눈물을 흘려야 하는데 나는 엄마가 우는 것을 아빠가 돌아가시던 날 곡소리로 한번 들어보았을 뿐이다. 자식들을 위해 모든 것을 삼켜야 했던 엄마는 혼자서 우는 것은 더 서러웠기에 힘들었을 것이다. 기억을 잃었다지만 노래를 끝까지 따라 부르는 노인들. 불현듯 머릿속에서 흘러나오는 기억의 한 끄나풀을 붙잡고 연달아 다른 추억들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을까? 웃어본 적 없는 것 같던 그 노인의 노래가 잊히지 않는다.
우리들에게 그런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시간은 또 온다.
1930년도에 태어나신 분들의 플레이리스트
(오빠 생각, 반달, 고향의 봄, 섬집아기, 김삿갓, 고향 생각, 반달, 동백꽃 아가씨, 개나리 처녀 등)
일제 강점기의 노래
https://youtu.be/GRDHRjB6Vd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