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동네의 뒤편 언덕에 늙은 사과나무가 있다. 그렇게 큰 사과나무는 거기밖에 없을 것이다. 올봄에도 사과나무는 꽃향기를 온 사방천지로 발산하며 제 이쁨을 과시한다. 샤넬 no. 5 향수가 그보다 더 향기로울까? 며칠간 잔뜩 들떠 사과꽃향기를 맡고 나니 이제야 그 향기를 다른 꽃향기와 분간하게 되었고 어떤 꽃향기보다 그 향기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매일 꽃 이야기를 하게 된다. 꽃타령만 하고 있으니 어디선가 이 힘겨운 시기를 보내고 있을 누군가의 눈치를 보게 된다. 내 삶에 있어 죄책감은 아주 오래된 히스토리다. 꽃 냄새를 맡으러 코를 사과꽃송이에 파묻으면서도 한쪽 눈으로는 혹시 누가 안 보나 하며 고개를 연신 좌우로 돌린다. 참 꽃들에게 미안한 품새다. 그래서 조금은 꽃 닮은 우아한 자세로 꽃과 일체가 되고 싶었다. 누가 뭐래도 이런 초록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단연코 없다고 할 만큼 화려한 잔디 위에 앉았다. 그러고는 한쪽 뺨을 무릎에 지탱한 손바닥에 올려놓고 게슴츠레 눈을 감고 사과꽃을 만지듯 냄새에 취해 보려 했다. 뒤늦게 자연과의 교감을 나누려 너무 무리하는 게 아닌가 하는 비아냥이 살짝 마음 어느 곳에선가 피어올랐다. 그때 나는 초록 잔디 위 흰 카펫 위에 앉은 사과향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곧 개 두 마리를 데리고 지나가는 행인에게 들켜버리고 말았다. 그 사과 꽃나무는 열매가 어마어마하게 많이 달리는 나무다. 사과가 떨어져 잔디 위를 덮을 때 토끼들은 사과를 먹으러 연신 어디선가로부터 들락날락했다. 하지만 내가 먹어보니 사과 열매는 작고 셨다. 샐러드로 몇 번 만들어 먹은 적이 있으나 공짜라서 그런지 금방 시들해졌다.
내가 사는 곳에서는 야외에서 꽃을 꺾는 것, 돌을 줍는 것, 열매를 따는 것이 별로 그리 반갑지 않은 행동이다. 누군가는 지척에 있는 산딸기를 따먹다가 "왜 자연을 훼손하느냐. 새가 먹을 건데!"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그 사람에게 "새들에게 허락을 받았다"라고 했나다 뭐라나. 5월 중순이 되면 고사리 때문에 마음이 설레면서도 어쩌지를 못한다. 고사리를 꺾어본 소감을 말하자면 뭐랄까? 아주 뜻밖의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고사리는 큰 키 때문에 무더기로 쓰러져 겨울을 난다. 그 고사리 무덤 사이를 뚫고 꼭 한 그루씩 불쑥불쑥 여기저기서 고개를 내민다. 허리가 길고 웬만해서는 바람에 쓰러지지도 않을 만큼 탄력이 있다. 하나 꺾고 고개를 들면 또 여기서 나 여기 있소 하면서 저만치 서 있다. 고사리와 밀당을 나누다 보면 자꾸 더 손을 내뻗으며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쩔쩔맨다. 무엇이든 마음껏 해보지 못한 분노 때문인지 고사리 허리를 오지게 꺾는데 재미있다. 이민 초기에 고사리 꺾으면 안 된다는 말을 못 들은척하고 검은 쓰레기봉투를 들고 지인들과 산을 헤맨 적이 있다. "국립공원 아니면 괜찮다는 말과 동네 뒷산은 국립공원은 아니다"라는 말에 두말하지도 않고 투표하듯 동그라미를 쳤다. 우리는 그때 시커먼 봉지를 어깨에 잔뜩 맨 산도둑이었다. 결국 비가 내려 말리지도 못하고 버리면서 마음이 뜨끔했다. 그 후로 꺾고 버렸던 기억은 내 마음에 생채기 같은 후유증을 남겼다. 그리곤 고사리를 잊기로 했다. 엄마도 고사리 뜯을 때 그런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자꾸만 눈에 선하고 잡힐 듯 아련하더란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눈앞에서 긴 허리를 하늘하늘한 고사리가 떠오른 적이 있던 나였다. 그 이후로 자연의 어떤 대상에 그렇게 꽂힌 적은 그다지 없었다.
사과나무는 견뎌온 시간을 보여주는 듯 가지 안쪽은 이끼가 잔뜩 끼어있고 나무 안쪽은 썩은 가지가 많다. 하지만 그럼에도 햇살을 맞는 겉 가지에는 해마다 저렇게 마치 신부의 부케처럼 꽃을 피운다. 볼 때마다 안타깝게 보이는데 순전히 내 마음일 거다. 그 매혹적인 사과꽃향기는 나의 향수 no. 1번이 되었다. 얼마 전 사과 꽃송이들을 유리병 안에 담아 내가 만나는 할머니들께 들이켜 향을 맡게 해 드렸다. 유리병에 있던 사과 꽃 한 송이씩 드렸는데 두 손 고이 받고서는 황송한 표정으로 가방에 넣고 손수건과 휴지에 싸서 나가시는 것이었다. 마치 당신들을 존중하는 것처럼 그렇게 사과꽃향기를 고이고이 모시던 어른들이었다. 어쩐지 눈이 매운 것 같기도 하고 가슴이 찡했다.
우리 엄마도 사과 꽃향기를 잊지 않았겠지. 여름이 깊어질 테고 가을이 오면 사과가 주렁주렁 매달릴 텐데 엄마께 국제 전화하며 구걸하는 것처럼 엄마는 그때도 살아계실까? 가을이면 저녁거리 준비하던 엄마처럼 사과나무도 열매를 잔뜩 매달고 언덕 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테다. 올해는 엄마 품처럼 늘어진 사과나무 밑으로 토끼처럼 기어들어가 들락날락 잼도 만들고 샐러드도 만들어야겠다. 사과꽃향기 가득한 언덕에 저녁마다 엄마가 역시 그리울 남편과 함께 산책을 간다. 우리 시어머니께서는 편찮으시다. 남편을 어머니는 알아보실까?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두 어머님께 자격도 없는 자식들이 되었는지 오랫동안 손 한번 잡아 드린 적이 없어 말할 자격이 없다.
멀리서 보이는 것은 온통 아직도 눈을 군데군데 얹어 겨울도 여전히 그 안에 있음을 알리는 우람한 산맥의 긴 능선이다. 햇살이 잘 드는 언덕에서 산을 마주하고 있는 사과나무일지라도 천년만년 살지 못하고 결국 수명을 다할 것이다. 내 남은 생애의 대부분이 자연들과 함께 할 것이며 그리로 돌아갈 것이다. 엄마가 점 점 더 체력이 약해져 간다. 허리를 다친 이후로 벌써 5년째 집안에만 갇혀 사는 엄마께 사과꽃 향기를 담아다 드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엄마는 비록 이 세상 잘 살았노라고 언제 하늘나라로 가든 엄마는 행복했노라고, 그리고 괜찮노라고 말씀하지만 사실 그날을 마루고 싶다. 엄마와 오래 머물 수 없다니, 아직도 어린 딸처럼 투정 어린 기대만 하는 나다. 내 마음속 사과나무 한그루 심어 사과향기 같은 엄마를 내 마음에 가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