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살 3월 둘째 주

그냥 살고 있어요

by RachelJane


[영원한 건 절대 없어]


직장생활 13년차.

파티션을 뒤로 한 옆 부서는 홍보팀이다.

홍보팀장님의 전화소리가 들린다.

'KBS라서, 카메라도 같이 나왔던가요?' 하고 묻는다.

아마도 문제가 되는 일이 있고, 그 일에 대해 미리 대비하려는 전략이다.

얼마전 직장생활을 30년을 훌쩍 넘긴 홍보실장님과의 대화를 통해 짐작컨대

홍보의 세계란 내게 몹시도 지치는 곳이었다.

’언론‘이라는 곳을 상대하는 일.

언론은 ’자본‘과 몹시도 끈끈하게 얽혀있다.

그래서 언론을 상대하는 일이란 곧 본인의 이익을 최대화하려

재빠르게 움직이는 이들을 상대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금세 ’나는 저런 곳에선 살아남지 못하겠어‘ 생각한다.


매일 아침, 팀장님은 실장님 회의에 참관하시며

그속에서 일어난 일들을 팀원들에게 공유해주신다.

일에 관련된 내용보다는 나는 잿밥에 관심이 많다.

회의 시간안에 벌어지는 대화 속에는 조직안에서

각자가 살아남기 위해 공격 혹은 방어태세를 갖추는

사회생활 베테랑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자기의 힘을 절대로 놓지 않으면서도

상대방에게 ‘적절한 수준’의 위협을 느끼게 하되,

필요한 만큼의 동료애를 느낄 수 있는 정도를 유지하는 그들.

나는 또 금세 ‘나는 저런 곳에서도 살아남지 못하겠어’ 하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이 하루에 두번 반복되니

어느덧 ‘그렇다면 나는 사회생활에 부적절한 사람인가’라는 생각에 떠올린다.

당연히도,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오’이다.

내가 목격한 것은 수만가지 중 두가지의 모습일 뿐이니까.

사람은 일생동안 안전감과 위협감을 번갈아가며 느끼며 살아간다.

그러나 각자가 무엇을 위협으로 느끼느냐와

무엇을 안전으로 느끼는지는 모두에게 다르다.


즉, 내가 느꼈던 ‘나는 저런 곳에서는 살아남지 못할거야’라는 나약한 마음이라는 것은,

저 두가지 세계에서만 유효한 것이다.

다른 곳에서 나는 완전히 잘 살아남을 수 있을거야 라고 느끼곤 하니까.

결국 인간이 나약하다 아니다의 판단은 몹시도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서만 유효한 것이다.


그러니 섣부르게 내가 어떻다 저떻다 판단하는 것도

크게 유의미하지는 않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이렇구나 정도의 인지만 하고 넘어가면 된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세상에는 뭐 심각한 일이 별로 없다.

왜냐하면 영속한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가 추천해도 될까요?]


떠오르는 생각들을 그냥 한번에 다 털어버리고 하루를 시작하면 어떨까?

조금 더 안정적이고 질서정연한 느낌을 받는 하루가 되지 않을?

타이머를 10분으로 맞추고 패드에 연결된 블루투스로 글자를 적는다.

모닝페이지.

아티스트웨이라는 책에 나온 나를 털어내며 창의력을 끌어오르는 방법이다.

떠오르는 생각을 자기 검열하지 않고 그대로 적어내는 것이 핵심이란다.

매일은 아니지만 마음이 좀 답답해지려나 싶은 지점에

미리미리 모닝페이지를 이용해 나를 털어내고 있다.


꽤나 효과적인 방법이다. 크, 이렇게 좋은 걸 만들고 퍼뜨리다니.

그리고 나는 그것으로부터 수혜를 받고 있는 셈이지.

참으로 이롭구나.

그런데 나를 돌아보면 나는 이런걸 늘 경계했다.

'이런걸' 이란 나에게 좋은 방법이 타인에게 좋은 방법은 아니겠지 생각하며,

괜한 고집을 부리거나 꼰대같이 보일 것을 우려해

나에게 이로운 방법이 있더라도 남들에게 알리는 조심스러워했다.

근데 그건 그냥 내 걱정 때문이 아닐까.

터무니 없는 우려로 어쩌면 내가 남들을 이롭게 할 수 있었던 길을

스스로 굳이 원천봉쇄하고 있었구나 싶은 반성이 든다.

일단 추천하고 하든 말든은 상대들의 선택일뿐.

타인의 주체성을 더 존중하는 차원에서라도

내게 좋았던 점을 조금은 적극적으로 알려봐야겠단 생각이 든다.




[다이루어질지니]


수지와 김우빈이 주인공으로 나왔던 다 이루어질지니 라는 드라마가 있다.

수지의 극중 이름은 가영. 극중에서 싸이코패스로 나온다.

타인의 불편함과 공포에 전혀 공감하지 못해 부모로부터 버려져 할머니의 손에 자란다.

할머니는 가영을 어떻게 해서든 사회에서 문제없이 길러내기 위해 다양한 것들을 가르친다.

그 방법 중 하나가 가영의 운동화에 돌멩이를 넣는 것이다.

돌멩이를 절대 빼지말라 호령하는데 그 이유가

사람들도 이렇게 불편함을 느낀다는걸 기억하라는 이유에서였다.


퇴근길 버스안.

오늘 하루 종일 했던 생각과 이 이미지가 동시에 떠오르며

나에게만 적용되는 메시지로 변한다.

오늘 나는 너무 멀리 보고 오지도 않을 걱정과 불안을 떨쳐내기 위해,

지금 오늘 현재에 집중하자는 다짐을 한 차였다.

이미지와 겹쳐지며,

나도 가영이처럼 운동화 안의 돌멩이를 둔 채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내 발치 앞을 보고 살기 위해서다.

멀리 보지 말고 지금 내가 겪는 일, 닿고 있는 땅과 신고있는 운동화에 집중하자는 것.

역시 예술은 만드는 자에게서 한번, 해석하는 자에게서 한번 탄생한다더니.

지니의 장면은 오늘 내가 또한번 탄생시킨 것이겠구나.

아무튼 나의 균형을 위해 나는 오늘에 집중해보기로 한다.



[모든 해석은 사후에 일어난다]


동행자는 아이스 라떼. 나는 따뜻한 라떼.

밖은 여전히 추운데 사무실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빨랐는지

막상 들어오니 나도 아이스라떼가 먹고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나 나는 감기 기운이 좀 있는 것 같고,

차가운 음료를 먹으면 아랫배가 나오니 내 선택은 잘 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사무실에 들어와 몇 분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다시 춥게 느껴지니 따뜻한 라떼를 선택한 것은 여러모로 성공적이었다.


무엇이 성공이었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이런 사후의 해석이다.

이른바 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도 그들이 진정 위인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아마 본인 스스로도 자신이 위인인지 그와 정반대의 사람인지 알 수 없었겠지.

그러나 그를 해석하는 누군가가 그의 다양한 모습 중 위인인 면모를 부각했고

그것이 글로 말로 영상으로 전해져 내려와 그는 어엿한 위인으로 둔갑한 것이다.

그렇게 둔갑한 위인은 여러 차례 세대를 거듭하며,

또 다시 시대의 영웅이 되기도 하고

뒤늦게 그의 과오나 비인간적인 측면등을 드러내며

위인의 자리에서 위협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결국 삶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입방정이자 귓동냥이다.

실제로 누가 어땠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JTBC의 뉴스룸. 거기서 하던 팩트체크 코너가 생각난다.

가짜 뉴스의 심각성이 어느때보다도 절정에 치달았던 때에

그걸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기획된 코너로 기억한다.

그러나 무엇이 가짜이고 무엇이 진짜일까.

가짜 뉴스를 믿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진짜이고,

가짜 뉴스를 비난하고 지적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반대의 것이 진짜겠지.

여기까지 적다보니 과연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리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의문이다.

명백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리는 없다.


그러나 문명화된 사회에 살고 있는 인간은,

명확하게는 종교가 존재하고 수렵을 벗어나 정착생활을 하게 된 인류의 사회에서는 진리가 존재해 왔다.

수렵의 시대에서 인류가 믿던 진리는

배가 고프면 무엇인가를 먹어야 한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눈 앞의 짐승을 죽여야 한다는 것.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렇겠지. 아주 단순하다.


결국은 단순한 생존본능만이 진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제 자식을 거둔다는 것은 포함되어 있겠지.

하긴 인류가 생존하는데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번식이므로

내가 낳은 것들에 대한 책임은 뼈와 피에 새겨진 DNA인 것이다.

생존본능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만 능사도 아니겠지.

그러나 나는 버릇처럼 생존본능을 들먹여

상황을, 사람을 그리고 세상을 이해하려 드는 것 같다.

이건 만능열쇠라 풀리지 않는 곳이 없달까.

그러나 내가 최근 겪는 고민은 또 생존본능과 닿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나는 얼만큼 문명화되어있고 얼만큼 생존본능을 따르고 있는지

나의 실체를 잘 모르겠다는 점이다.


[울고싶은 날]

브리저튼을 보는데 집안의 셋째딸이 남편을 잃는다.

아주 젊은 나이이고 두통이 있다고 낮잠을 자겠다던 남편은 그길로 다시 깨어나진 못한다.

프란체스카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힘들어하는 성정을 가지고 있다.

침묵 속에서 위안을 찾는다.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만 동떨어진 세계를 살고있다는 고독을 느끼는데

남편만이 그녀의 세계를 이해했다.

그런 남편이 말도 없이, 예고도 없이 사라졌다.


그녀는 모든 것에 순응하며 살고 늘상 긴장한 채로 살아왔다.

귀족사회의 규율을 엄격하게 지키며 필요이상으로 스스로를 정제했다.

슬픔과 비통함을 꾸욱 누른 채 엄격한 장례식을 치루는 그녀를 보는게 너무 슬펐다.

나를 이해해주던 한 사람이 이렇게 말도 없이 사라지면 어떤 기분일까 생각하니 감정이 갑자기 터져버렸다.

그런 상황에 있는 내게 누군가 언젠가는 괜찮아질거라 위로를 건넨다 상상하니 분노가 일었다.

그가 사라졌고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그가 살아돌아오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괜찮아지겠냐고

그가 없는 이상 아무것도 괜찮아질수없다고

미치광이처럼 소리지를 장면이 떠올랐고 나를 압도했다.


눈물을 흘리고 감정을 쏟아내는 동안

나는 그것이 브리저튼 때문이 아니란 걸 이미 느끼고 있었다.

나는 쏟아내고 싶었고 브리저튼이 나를 도와준 것이다.

프란체스카에 감정을 이입시킨 것도

그녀의 남편이 죽었다는 사연때문이라기 보다는,

눈물과 분노를 폭발시켜도 될만한 상황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실컷 울었다.

흐그극 고마워요 브리저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