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3/22
아이의 등원을 도와주는 이모님께서 집안 사정이 생기셨다.
며칠간 출근을 못하시니, 아이 등원을 어떻게 해야 하나 당황스럽다.
그러다 문득, 지금 이모님 전에 아이를 돌봐주시던 분이 떠올랐다.
얼마 전 아이가 잘 지내냐며 먼저 연락을 해주셔 금방 생각난 모양이다.
아이는 그분을 할머니라 부른다.
겨우 40개월 남짓 산 아이에게 6개월 전이면, 꽤나 역사적인 과거인데
아이는 할머니의 이름도 할머니께서 주신 선물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요새는 내가 출근할 때마다 '엄마 가지마' 눈물 콧물을 쏟는데
오늘은 할머니가 반가운지 쪼르르 뒤따라가
그간 새로 생긴 장난감을 소개하느라 바쁘다.
아이 마음속에 그 분이 좋은 분으로 자리 잡아있기에 가능한 일.
무엇보다 그 사실이 기쁘다.
할머니도 아이의 안부를 간간히 물어봤고,
이렇게 급하게 부탁했을 때도 흔쾌히,
아이가 보고싶었다 이야기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다.
이런 순간인가보다.
'내가 그렇게 나쁘게 지내지는 않았구나.' 하는 안도감.
나는 가족이 아닌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지낼 때
조금 더 애정을 쏟고 잘해주려는 마음이 드는데,
이를 번번히 '굳이' 라는 단어를 가져와 밀어낸다.
아마도 정을 주었다가 그것이 비수가 되리란
드라마적인 생각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겠지.
그래서 내가 부담스럽지 않게.
그러나 진심을 담아서.
그렇게 힘을 빼고 지내도 여전히 잘 지낼 수 있어야
건강하고 오래 지속한 가능한 관계라 믿어왔다.
그래도 가끔은 가끔 내가 이렇게 지내도 되는지 조바심이 들곤 했다.
이것으로 충분할까.
조금 더 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내 식대로 지내온 이 방식에서 할머니로부터 따뜻한 피드백을 받으니,
괜히 나를 지켜보던 누군가가 내게 나긋하게,
'그래. 너 잘살고 있단다.' 이야기 해주는 것만 같다.
아이가 새벽 5시 반에 깼다. 주말 아침.
제발 조금만 더 잤으면 좋겠다!!
아직 잠결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비몽사몽.
팔 베개를 해달라는 아이에게 오른쪽 팔을 내어주고
아이가 잠들 때까지 토닥토닥.
선잠 상태인 아이는 오감이 민감해져
내가 조금만 움직여도 일어날랑 말랑.
나는 밤새 참아온 화장실이 가고싶고
팔이 저려오지만 일단 참아본다.
조금이라도 더 재우려는 마음으로.
(’평일 수면이 좀 부족한 아이를 생각해 더 재워야한다!‘
는 좋은 구실삼아.. 내가 늦잠을 자려했겠지..?)
아이는 17kg가 넘었다.
이제는 서서 오래 안아주기엔 벅찬 무게다.
팔베개에서도 같은 맥락인지,
겨우 며칠전보다도 팔이 저리고 아프다.
오우 점차 피가 안통하는 기분. 감각이 무뎌진다.
그렇게 두시간을 버티다 일곱시 반이 된다.
두 시간의 팔저림을 참다니,
두 시간의 팔저림을 견딘다니,
이건 무엇이지?
아이가 둘인 집에서 둘째이자 막내로 살아온 나.
위로는 오빠라 막내 여동생으로 언제나 귀여움을 받고 살아서일까.
나는 누군가가 나를 챙겨주는 것에 익숙해있다.
치킨을 먹어도 내 접시엔 늘상 부드러운 부위만 놓여졌다.
그런 내가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를 위해서 불편함을 참게 된다.
여태까지는 몸집이 큰 어른으로서 몸집이 작은 아이를 돌보는 일을
세상의 생리상 당연지사로 받아들이고 행동했던 것 같다.
아마도 ‘모성애’ 라는 단어에 요구되는 의무를 이행한달까
혹은 어른의 사명감 그리고
언제나 통실통실 불룩한 삐져나온 볼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해서 그랬다고 여겼다.
사실은, 의식적으로 내가 불편함을 얼마나 감수하고 있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도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오늘 아침 문득
‘두시간의 팔저림을 왜 견디는 건 어떤 마음일까‘ 궁금해진다.
내가 전과 달라졌구나 하는 생각이 떠오르고,
아이를 챙겨주는 일에 대한 감각이 변했음을 깨닫는다.
길거리에서 강아지 두마리를 보았다.
주인이 목걸이를 잡고, 쪼꼬만 생물체들이 촐랑촐랑 열심히 산책한다.
저 사람이 저 강아지를 돌보는 책임감은 무엇일까.
‘내가 아이를 돌보는 마음과 별반 다르지 않겠구나.’생각하다,
문득 내가 예전에 강아지를 키우고 싶은데 못 키우는 이유로,
주객이 전도된 삶이 될거같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여행도 제대로 못가고, 산책도 매일 시켜줘야 하고,
사료도 제대로 된걸 골라야 하고, 아프지 않은지 체크해줘야 등등.
그런 것들을 하면 ‘진짜’ 내 삶의 자유가 제약이 될 것 같아
엄두도 내지 않았던 것.
그런데 오늘 강아지를 마주친 순간,
그랬던 내 생각이 변했음을 자각한다.
‘책임감이 나를 기쁘게 할수도 있겠구나.’
아이가 나를 바라고, 아이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들을 선사하는 기쁨.
강아지를 돌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돌보는 일이 번거롭긴 하지만
그 일들이 따뜻한 온기의 생명체를 돕고 있다는
어떤 마음의 활기같은걸 만들어내겠지?
얼마전 봤던 유투브의 쇼츠.
’결핍이 있는 사람들끼리는 절대 떨어지지 못한다‘던 내용에 달린 댓글.
‘챙겨주길 원하는 사람은 챙김받길 원하는 사람을 만나면 행복해진다‘
그렇지.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지.
챙기는 것으로 행복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지. 많지.
그리고 한 사람 안에서도
수없이 다양한 인격과 기쁨과 욕구가 존재하는 법이고.
아마도 오늘 느낀 나의 감각은
내 안에 있는 ’챙겨주고 싶은 욕구‘가 있는 사람.
그걸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을 깨운 것 같다.
그리고 동시에 그런 과정을 통해 ’나는 제법 괜찮은 사람이야‘하며
나를 내 스스로가 인정하는 거구나. 하고 깨달았다.
결국 내가 나보다 연약한, 혹은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를
챙긴다는 것은 내가 나를 스스로 좋은 사람이라 여길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임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winwin일세.
마음가짐의 변화로, 괜히 세상이 더 살만해보인다.
결국 삶을 더 쉽고 편안하게 만드는 방법은 ‘마음가짐’이 다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게 아닐까.
삶이라는 것이 과연 우리에게 만져지는 물성일까?
물리적인 것을 떠나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오우 생각이 또 막 흩어진다.
그래서 어쨌든 아이를 도와주는 게 매일매일 더 기뻐진다는 이야기다.
피곤할 때는 정색의 얼굴이 튀어나오곤 하지만,
그래서 아이는 엄마 나 혼나는거야? 라고 묻곤 하지만,
뭐 어쨌든 간에 내 느낌은 그렇다.
나는 매일 조금씩 더 아이를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지금은 쌍방향 사랑인데 좀 더 크면 짝사랑이 되겠지?
괜찮아. 그래도 사랑할꼬야. 마음의 준비를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