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 뭔지

(feat. 내가 술인지, 술이 난지 모를 하루)

by Rachel

나는 꽤 오랫동안 내 주량을 몰랐다.

대학생이 되어서야 비로소 ‘내가 얼마나 마실 수 있는 사람인지’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저,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확 붉어진다는 것.
그게 내가 아는 전부였다.



처음 소주를 마신 건, 중학생 때였다.
간부 캠프에서, 몰래 돌리던 보온병에 한모금씩 마시던 그 날.


처음 맥주를 마신 건, 고등학생 때였다.
수능 100일을 기념하던 날, 선배가 준 비커에 담긴 50cc 맥주.

그 때는, 동기들과 술을 나눠 마셨고,

우리 동아리는 과학탐구동아리였기 때문에 비커에 나눠 마시는 게 전통이라며

50cc씩 비커에 나눠 마셨던 기억이 난다.


그 외엔 보호자가 있는 자리에서 ‘제주’처럼, ‘귀밝기 술’처럼
허용된 이름을 달고 마셨던 술들이 전부였다.


대학생이 되어 처음 가지는, 보호자 없는 술자리.


불금, 선배들과의 첫 술자리는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긴장도 있었지만, 그보다 웃음이 많았다.


문제는—
내가 술을 마셨는지, 술이 나를 마셨는지 모를 만큼
내 주량을 전혀 모른 채,
폭탄주를 세 모금 넘게 들이켰다는 거였다.


그 순간은, 그냥 괜찮았던 것 같았다.
목넘김도 부드러웠고, 분위기도 따뜻했다.


나는 웃었고, 이야기를 나눴고,
스스로 꽤 멀쩡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내 몸 안에서 어떤 파도를 일으킬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한 시간 뒤를 모른 채— 나는 그저, 웃고 떠들고 있었다.


깔깔거리며 숨 넘어가게 웃다 보니, 어느 순간 머리가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내 아프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복학생 선배들의 아재 개그가 너무 웃겼다.

제정신이었다면 하나도 안 웃겼을 텐데, 그 뻔한 말장난에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고,
눈앞은 빙글빙글, 속은 슬금슬금 뒤틀렸다.


이거 뭐지? 나 계속 이러면 큰일나는데.
싶어서 비척, 비척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럴 수가.

몸에,
도무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일어나지 못하는 나를 본 동기 남자아이가 수상한 낌새를 느끼고 나에게 일어나라고 했다.

나는 일어나려고 다리에 힘을 주었지만, 일어날 수가 없었다.


"어? 나 힘이 안 들어가."

"하- 어쩐지 주량도 모르는 애가 너무 무리한다 싶더라니-"

한숨을 쉬며 동기 남자아이가 이마를 짚었다. 그 순간, 나는 그 동기 남자아이가 산적임을 깨달았다.

"어? 산적이다."

"야- 너 내가 그거 부르지 말라고 안 했.."

"산적 맞네. 너는 알아보는 것 같으니까, 네가 네 동기 챙겨라."

내 옆에 앉아 있던 '부모님 기수' 선배 중 회장 선배의 말에, 산적의 표정이 살짝 흐릿하게 보였다.

"네, 선배."

"D야. 이제 그만 먹고 일어나서 집에 가야지?"

"선배~ 나 재미있는데 조금만 더 놀다가 가면 안돼요?"

"기숙사생들 이제 슬슬 집에 갈 시간이야. 그러니까 그만 하고 일어 나."

"나 좀만 쉬다가 갈게. 물 한잔만 주라아~"

산적이 건네는 물 한잔을 들이킨 뒤, 정신을 차리려고 했는데 기우뚱- 하더니 내 고개가 땅에 닿아 있었다.


"잉? 왜 이러지?"

"왜 그러긴. 잠들어서 그래."

끙끙대는 말투를 듣고,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려 옆을 쳐다봤다.

힘이 없는 나를 받치느라 힘든지, 산적이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여기는 어디야?"

"어디긴. 기숙사지."

"에? 기숙사- 여기 아닌데."

"기숙사 입구야. 이제 올라가. 10분 남았더라."

"아...."


찬 공기 바람을 쐬니까 정신이 들었다.

"미, 미안해."

사과의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폭탄주 말아준다고 신나서 마셔버리고 필름까지 끊긴-

그리고는 기숙사로 어떻게 올라왔는지도 모르는 그런 하루.


금요일이라 점호가 없으니 다행이지만-

그래도, 머리가 아파오는 게 술이 깨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마시고 자."

"응?"

산적이 불쑥 내민 건 숙취해소제였다.

"어- 이거 비싼 건데."

"그래. 니 주량도 모르고 폭탄주 마셨으니 내일 좀 머리 아플거야. 선배들이 사다 주라더라. 마시고 자."

"어.. 고마워."

"그럼 너도 자라- 난 이제 선배들이랑 3차 간다."


묵묵히 손을 흔들어 보이면서 산길을 내려가는 산적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술이 깨면서 몰려오는 '숙취'를 처음으로 느꼈다.

숙취는, 술이 난지- 내가 술인지 모를 때 찾아오는 고통이었다.


그 숙취가, 지독하리만큼 몸에 오랫동안 남았고

나는 그날 챙겨준 숙취해소제를 뒷날 뒤늦게서야 먹었다.


숙취해소제를 언제 먹어야 하는지,

뒤늦은 숙취해소제는 어떻게 나를 만드는 지도 모른 채로.



그 날의 숙취 해소제의 빈 병은- 그 주가 다 가도록 기숙사 방 서랍 속에 있었다.

치우기를 깜빡한 건지,

다정한 모습을 보여준 산적 때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그날 먹은 숙취해소제로 내가 엄청나게 혼이 나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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