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광복 80주년을 맞은 꿈)
1919년 겨울, 포탄 공장 근방.
독립군이 고향으로 보내온 한 통의 편지와,
그에 답한 편지가 있었다.
나는 그 눈발이 흩날리는 추운 겨울바람을
몸으로 느꼈고, 그곳이 포탄공장 근방임을,
재만이 보낸 편지를 하늘에서 들리는 목소리로
알았다.
재만은 나이면서, 내가 아니었다.
그가 비통한 심장으로 쓴 편지.
나는 그곳에서ㅡ 들을 수 있었다.
엄니.
나는 죽으러 가오.
엄니, 나는—
우리 태린이가, 태진이가, 태만이가
뭘 그리 잘못했는지 모르겠소.
공출하듯이 일본놈들에게 끌려가서 공장에서 착취당하는 것을 보고도,
사람새끼가 아니라면서 혹사하듯 굴리다가,
개처럼 맞아 죽는 이 현실이 나는 너무 이해가 가지 않소.
우리 친척동생이라 할지라도, 내새끼가 아니라도,
우리 태린이가, 태진이가, 태만이가 뭘 그리 잘못하였소?
한창 뛰어노는 저 일본 애들이랑 같은 나이에
공장으로 끌려가 저놈들의 무기를 만드는 일을 하다가,
지쳐서 잠시 숨을 고른 것뿐인데
등에 ‘쨍’ 소리와 함께 내리꽂힌 채찍 자국이
쌔빨갛게 번져가던 그날을, 나는 잊을 수가 없소.
피 냄새와 쇠내가 한데 섞여 숨이 막혔지만,
나는 따지지도 못했소.
저놈들의 순사봉이, 순사들이 가진 총이 두려워서.
그런데 엄니,
나는 이제 죽으러 가려고요.
엄니도 알겠지만 독립군이 어디에 있다고 합디다.
나는 그 독립군이 되어,
나라가 저 악질적인 일본놈들의 군홧발에 짓밟히지 않도록 하려 합니다.
그러니 내가 뼛가루가 되어, 재가 되어 돌아와도
슬퍼 마소.
나는 내 몫을 다해
태린이가, 태진이가, 태만이가 뛰어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울 터이니.
재만아.
엄니다.
네가 떠난 이후,
네가 지키려 했던 태린이도, 태만이도, 태진이도 모두 갔다.
일본놈들이 발악을 하니, 어쩌겠니.
아이들 모두 공출처럼 끌려가, 생사를 모른다.
그래서 엄니도, 아부지도 총을 들었다.
아이들을 구하려면 뭔들 못 하겠니.
우리의 미래는 아이들인데.
재만아, 우리는 지붕에 숨어 산다.
성훈이와 사랑이가 지붕에 숨어 살고,
나와 태수 하나만 남아 폐가 지붕에 숨는다.
그 폐가에는, 태린이와 태린이 애비가 함께 살던 곳이었는데-
태린이 애비가 병으로 죽은 이후 을씨년하게 변해버려 귀신 나오는 집이라 소문이 났단다.
어제는 일본놈 하나가 우리 집 촛불 하나를 알아차려,
태수랑 내가 간신히 그놈들에게 총을 쏘아,
집을 유령의 집처럼 만들어 쫓아냈구나.
코를 찌르는 화약 냄새가 골목을 덮고, 달빛에 날린 먼지가 목에 걸렸다.
애비는 주재소에 가 계속 아이들을 돌려 달라 애원했지만,
애들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며 초주검으로 돌아왔다.
이제 회복한 네 애비는 내일이 제 기일이 될 것이라며 화염병을 준비 중이구나.
애비 싸우는 것 보고, 하늘로 잘 올라가거라.
애비도 에미도, 너와 함께 하늘로 갈 것인즉.
태수는 멀리 서울 친척집으로 보냈다.
우리 촌에서 살던 아이들 중 이제 태수 하나만 남았구나.
에미는 애비를 도와 내일,
일본놈들 포탄 만드는 공장에 갈 것이다.
그곳에서, 그놈들 포탄에 불을 지르고,
폭발하는 꼴을 보고야 너 따라 하늘로 가려 한다.
엄니.
나는 고향집 지붕에 숨어 모든 걸 봤시유.
엄니가 그 뛰어난 총술로 일본놈들 하나하나를 쓰러뜨리는 것도 봤고,
태진이가 울면서 할머니를 부르짖는 것도 봤고,
태진이가 그놈들 포탄 한가운데서 사라지는 것도 봤소.
아부지는 태린이를 데리고 가는 걸 막으려다 불에 그슬렸소.
그런데도 그 불길 속에서 놈들의 공장에 불을 지르고,
포탄이 폭발하자 그렇게 환하게 웃더이다.
내 죽고 나서 처음 본 웃음이었소.
성훈이와 사랑이가 도망가는 것도,
엄니가 죽을 준비를 하는 것도 봤소.
포연 사이로 엄니의 눈빛이, 밤하늘의 별처럼 또렷했소.
마음은 이제 편안하소?
이제, 먼저 가 기다리는 태린이, 아부지, 태진이와 함께 손잡고 가소.
같이 가서— 태린이 아부지랑 태린이에게,
태수는 새 조국에 남아 있다고 말하러 갑시다.
그리고 엄니…
언젠가 이 땅에, 다시는 아이들에게 채찍이 내려앉지 않는 날이 올 것이오.
그날, 우리 모두 별이 되어 아이들 머리 위에 빛이 되어 있겠지요.
우리가 지킨 나라는-
그런 행복한 나라가 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재만와 엄니의 편지를 모두 듣고 난 나는,
새벽에 일어나 섧게 울었다.
포연과 울음처럼 설킨 총소리가 퍼지는 그 현장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재만의 옆에서 피눈물을 삼키는 엄니와,
화염에 둘러싸인 태진이가 포탄을 꼭 안고 죽는 모습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태린이의 손을 꼭 잡고, 일본군들에게 끌려가지 않으려 버티는 아부지와,
개미처럼 몰려드는 일본군들에게 총을 한발 한발 쏘는 엄니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나는 가슴이 너무 아파 그 꿈에서 깨었다.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한 그 꿈에, 나는 30분을 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신랑은 꿈이라며 나를 토닥여 주었지만, 나는 그들의 얼굴이 기억나 너무나도 생생해
펜을 들고 꿈을 기록했다.
나문희 선생님을 닮은 엄니의 눈빛과, 불 속에서 환하게 웃던 이순재 선생님을 닮은 아부지의 웃음-
송강호 씨의 얼굴을 닮은 재만의 얼굴 피울음까지-
나는 그 장면들을 떠올리며, 슬픔에 잠겨 다시 펜을 쓰다 눈물을 훔쳤다.
나의 꿈 한 조각은, 그렇게도 생생했다.
나는- 그들이 그렇게 지키려 한 나라에 살고 있으므로,
그 마음들이, 그 피울음과 한이 서린 나라에서 힘차게 살아가야겠다,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