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합숙날

(feat.실수투성이로 시작하는)

by Rachel

시험이 끝나고, 방학이 시작하는 날.

나는 술이 나를 마신 듯 고주망태가 되도록 마신 날이었다.

학생 기숙사는 한창 이사로 바빴다.

방학 잔류 학생들은 짐을 싸서 새로운 룸메이트와 함께 지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강의실의 무거운 공기에서 해방된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복도마다 쌓여 있는 캐리어와 박스들이 다시 또 다른 질서를 요구하고 있었다.
시험이 끝나면 숨을 고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분주해진 셈이었다.


나는 숙취로 아픈 머리를 붙잡고 청소와 짐 싸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책상 위와 방바닥에는 정리되지 않은 문제집과 프린트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책도 방학 동안 가져갈 것과 두고 갈 것을 가르느라 한참이 걸렸다.

기숙사 복도는 이삿짐을 든 학생들로 북적거렸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박스 테이프 찢는 소리와, 무거운 짐을 옮기는 발자국 소리.
마치 시험이 끝난 자유보다, 새로운 분주함이 더 크게 다가왔다.


잔류 학생들은 모두 짐을 싸서, 방을 옮겨야 했다.
학교 기숙사는 방학 동안 체육과7 학생들의 합숙소나 교류전,
혹은 학교 손님들의 숙소로 쓰일 예정이었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 엄격한 청소가 요구되었다.

사감 선생님의 꼼꼼한 따짐에, 나는 무려 세 번이나 다시 청소를 해야 했다.
물때 하나 없이 반짝반짝 닦아내야 했고,
심지어 천장에 얼룩이 있나 없나까지 검사하는 그 눈길은
깐깐하다 못해 독하게 느껴졌다.


투덜대면서도 사실 나는 합숙이 많이 기대되었다.

그래서 결국 활짝 웃으면서 걸레질을 하고, 먼지를 털어냈다.

방학 동안 쓰지 않을 짐들은 엄마 아빠가 있는 본가로 택배를 붙였다.
박스는 고작 두 개였지만,
그 안에 넣을 것과 남겨둘 것을 가르느라 한참이 걸렸다.
택배를 부치고 나서야 방은 조금은 널찍해졌고,
남은 자리에는 곧 다가올 합숙의 짐을 채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합숙 짐은 그리 많지 않았다.

여름 계절학기가 끝나고 나면, 바로 합숙을 시작할 것이었기에

나는 계절학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물론, 방학 때는 책을 읽을 시간이 많았기에 도서관에 거의 살다시피 했다.

아침 훈련이 끝나면 샤워를 하고 아침을 먹은 뒤,
나는 늘 도서관 열람실로 향했다.

에어컨이 빵빵하게 돌아가는 시원한 공간에서,
좋아하는 책을 실컷 읽는 시간이 내겐 가장 큰 축복이였다.

두세 시간을 꼬박 책 속에 파묻혀 있다 보면 어느새 두 시.
졸음이 몰려오면 버스를 타고 기숙사로 올라갔다.
정류장에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책을 읽으며 계절학기를 보냈다.


그 책이 어느새 오백 권이 넘었는지도 몰랐다.
도서관 근로 학생은 나를 볼 때마다
“오늘도 오셨네요”라며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책을 다 읽을 때쯤이면 저녁이었다.
저녁에는 늘 혼자 밥을 먹곤 했는데, 내 귀에는 언제나 MP3가 꽂혀 있었다.

빨래를 하거나, 혹은 나만의 상상 세계를 펼쳐 공책에 설정집을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는 빠르게 흘러갔다.

그리고 계절학기가 끝날 무렵, 드디어 합숙이 시작되었다.


새벽에 짐을 꾸려 미니버스에 올랐다.
선배들이 준비한 합숙소는 D동에 있는 H도장이었다.
학기 동안 시합을 준비하러 자주 가던 곳, 지도사범님의 도장이었다.

춘계검도연맹전과 춘계 재부시합을 준비할 때, 우리는 늘 선배들을 도와 잔심부름만 했다.
하지만 이제 2학기. 이번엔 우리가 선수로 나가야 했다.
그래서 선배들과 함께, 다시 도장으로 향했다.


다시 태어나, 신입생 검도 시합에 나서는 신입생이 되고자 했다.

죽도와 호구를 진짜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리고 검도의 장비 하나하나에 익숙해지기 위해.



저녁 무렵, 도장에 도착하자마자 훈련이 시작됐다.
밥도 채 먹기 전에, 우리는 호구를 입고 죽도를 들었다.

“하나! 둘!”
기합소리는 우렁찼지만, 내 몸은 영 엉거주춤했다.
분명 학교에서 수없이 해오던 기본기인데, 도장 바닥에 서자마자
다리가 제멋대로 꼬이고, 팔이 늦게 올라갔다

"D, 그게 뭐야! 다시!”

“거기 발, 발! 발 안 보이냐!”

몇 번이고 똑같은 지적이 이어졌다.
아무리 애써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합숙의 첫 훈련날은, 설렘보다는 혼남으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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