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緣)
세계는 바다로 이어져 있다.
그리고 그 바다는, 오래된 기억처럼 흐른다.
바다는 오늘도 숨을 내쉬고 들이마신다.
그 파도와 숨결 사이에서, 다른 숨 하나가 천천히 형태를 갖췄다.
거품 속에서 일렁이던 회색빛은
어느 순간 팟 하고 꺼지며 어두운 형체를 남겼다.
사람의 모습이었다.
파도에 떠밀려, 조용히 해안으로 올려졌다.
눈을 감은, 사람의 형체.
시체일까. 아니면 사람일까.
바닷가에서 검을 휘두르던 나이트 희망자 소년들이
그 형체를 잠시 굽어보다가,
스승에게 알리러 우르르 달려갔다.
한 아이만이 남아, 조각 같은 얼굴의 형체를 굽어보았다.
소년이 손을 뻗어 닿으려는 순간—
[이안.]
누군가 속삭이듯 부르자, 이안은 눈을 떴다.
긴 잠 속에서 흘려보낸 시간이
바람결에 녹아 사라진 듯,
회색 머리칼만이 파도결에 흔들렸다.
눈을 뜬 이안은, 자신 앞에 머뭇거리던 작은 손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시체가 아님을 깨닫고 화들짝 뒤로 물러났다.
멀찍이서 다른 아이들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바닷가에 잠시 평온이 깃들었다.
소년들의 검 끝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사이,
이안은 알 수 없는 쓸쓸함에 한숨을 고르게 들이켰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바다와 해룡, 권속 아르마.
금기는 희미해지고, 오래된 기생의 방식만이 남았다.
멀리서 푸른 깃발이 바람에 하염없이 펄럭였다.
그제야 이안은 여기가 어디인지,
왜 이곳에서 잠들어 있었는지를 어렴풋이 떠올렸다.
“저… 저기.”
뒤에서 스며드는 목소리.
돌아보니, 짧은 금발과 초록 눈을 가진 소년이 서 있었다.
바닷속 빛처럼 흔들리면서도 또렷한 눈이었다.
이안은 그가 방금 전 손을 뻗던 아이임을 알았다.
“저는 시젠이라고 합니다.
당신의… 보호자가 되고 싶습니다.”
파도에 깎여나간 조약돌처럼 서툰 고백이었다.
이안은 잠시 말을 잃었다.
소년의 얼굴 위로 오래된 누군가의 모습이 겹쳐졌다.
—시젠타.
아득히 먼 이름.
이안은 손을 내밀었다.
손끝에서 바람이 맴돌고 빛이 엉기며,
두 사람의 피부에 붉은 원과 눈의 문양이 피었다.
맹약.
파도와 바람의 소리가 멀어지고,
둘의 숨결만이 남았다.
“끝난 겁니까…?”
“그래. 이제 넌 내 나이트다.”
“왜… 저인가요?”
소년의 물음에, 이안은 말없이 손끝으로 맹약의 문양을 매만졌다. 소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시젠타의 후손입니다. 이안 님.”
이안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아직도 내 이름을 아는 이가 있었나.”
“오백 년이 흘렀습니다. 시젠타 님은…
레이튼에서 폭주를… 막다 돌아가셨습니다.”
폭주.
그 단어는 바닷속 심연처럼 깊게 가라앉았다.
“또… 순례길이구나.”
바람이 지나가며 파도 위에 잔빛을 떨어뜨렸다.
이안은 천천히 바다를 바라보았다.
아주 오랜 시간 끝에 돌아온 듯한, 쓸쓸함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