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바다의 약속

연(緣)

by Rachel

다시 순례길이라며 머리칼을 그러모아 묶는 이안을 본 시젠은 품을 뒤적였다.

그 품에서 나온 것은- 빛바랜 단검.

마치 꿈결 속에서 다시 건져 올린 듯한—
아득히 오래전, 첫 만남의 증거였다.

이안은 단검을 바라보았다.
무지개빛 조개결이 스며 있는 칼날.

바다의 단검.
해룡의 숨과 머메이드의 피가 실린, 오래된 맹약의 증표.

그 순간, 묻어두었던 기억이 파문처럼 일었다.

레이니가 그 단검을 시젠타에게 건네던 날.
머메이드는 인간을 해치지 않겠다는 약속.
그리고 인간의 왕이었던 자신이
그 약속을 끌어낸 이유.


—그러나 그 맹약을 깰 시간이었다.



인간은 여전히 탐욕스러웠다.
평온을 주었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았고,
오백 년이 지나도 상처의 반복은 멈추지 않았다.



이안은 숨을 고르더니,
단검을 바다로 던졌다.

물결이 순간 일렁이고, 빛이 번저 갔다.
거품 속에서 한 손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흰 손을 매개로 조금씩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거품이 한방울 두방울 일더니, 거품 속에서 아름다운 머메이드가 나타났다.

머메이드는 황금으로 만든 관을 쓰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이안?]

“내 오래된 벗- 레이니. 이제, 맹약을 깰 시간이야.”

[왜?]

“내가 떠났어도 인간은 변하지 않았어.
용과 머메이드, 인간 사이의 평온은 이미 유효기간이 지났지.”

[그래서, 우리가 인간을 공격해도 되는 건가?]

섬뜩한 바람이 그들 사이를 지나갔을 때, 잠시 숨을 고른 이안이 대답했다.


“아니.”
이안은 바람을 바라보며, 레이니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난 다시 순례에 들 거야.
그리고 그 순례가 끝났을 때,
네가 해야 할 일이 있어 부른 거야.”

[무엇을?]

“시젠타와의 약속을 지켜줘.
단검에 새겨져 있던 그 약속을.”


레이니는 잠시 망설였다.

[그건 네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야, 이안. 우리는 너를 더 우선해.]

“고마워. 하지만… 이제 때가 임박한 것 같아.”

웃는 이안을 보며, 레이니는 고개를 끄덕인 뒤 나타낼 때처럼 파도거품처럼 사라졌다.


대신 작은 진주 귀걸이 하나가 이안의 손바닥 위에 남았다.
—함께하겠다는 조용한 표시처럼.

시젠은 그 장면을 보며
말을 잃은 얼굴로 서 있었다.


“처… 처음 봤어요. 머메이드 퀸을.”

“이젠 자주 보게 될 거야.”
이안은 단검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 나이트가 되었으니까.”






레이니와의 대화를 끝낸 이안은
조용히 바람의 방향을 읽은 뒤 도시의 중심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젠이 그 뒤를 따라오며 물었다.

“이안 님… 인간세계로 발을 들이시는 건 처음이 아니십니까?”

“응, 그래.”

“그런데도… 이렇게 잘 가시네요?”

사소한 호기심을 담은 질문에 이안은 가볍게 픽 웃었다.

“오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건 상단뿐일 거야.
그리고 여기는—내가 가장 좋아하던 상단이거든. ‘딥 블루’ 상단.”



보랏빛 마력석으로 타오르는 해초 등불이
물빛 흔들림처럼 천천히 벽을 스쳤다.
그 빛을 지나 이안은 익숙한 걸음으로 상단 안으로 들어섰다.

둘이 들어서는 순간—

거래를 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보았다.

계약서를 넘기던 손이 멈추고,

계약금을 계산하던 점원도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이곳, 연에서 가장 큰 딥 블루 상단.
늘 보이던 계약자들이 아니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둘의 조합은 더 눈길을 끌었다.


회색 머리의 낯선 인물.
그리고 그 옆의 소년.

시젠 아르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되짚어보게 되는 이름.
그래서였을까.
사람들의 눈빛에는 설명할 수 없는
악의 어린 호기심이 번져갔다.


“저 아이가… 왜?”

“혼자도 아니네?”

속삭임이 은근히 번졌다.

시젠은 그 시선을 모른 척했지만, 이안은 사람들의 시선을 스치며
조용히, 그러나 자연스럽게 그를 앞으로 이끌었다.


그러자, 상단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안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

“나는 소통자입니다. 그러니, 아르마를 검사했으면 하네요.”

상단주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우리 아르마들은 합법적인 ‘양식’ 아르마들입니다만.”

“‘양식’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죠. 안 그런가요, 하다온?”

그 이름을 들은 상단주의 얼굴이 굳었다.

“…그 이름을, 어찌 아십니까?”

“숨겨진 이름은 언제나 이유가 있는 법이지요, 하다온.”

그 한마디에 상단주의 경계가 풀렸다.
숨을 고른 그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면, 모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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