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술기운을 빌린, 첫 마디)
“1년 행사, 어떤 흐름으로 갔는지 기억나?”
“응, 그러니까—”
사실 고문이랄 것도 없는 게,
나랑 함께 1년 행사를 치러온 후배도 있어서
회의는 내가 없어도 될 만큼 매끄러웠다.
“……”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 있으니,
내가 왜 여기 앉아 있는지조차 모를 만큼
멍청한 기분이 들었다.
멍하니 앉아 있는데,
선배들 중 한 명이 말했다.
“거기서 가만있으면 안 되지. D는 거기서 아쉬웠던 점을 말해야지.”
“네?”
“우리가 행사했었잖아. 우리 마지막 회의니까, 마지막으로 아쉬웠던 점을 말해 봐.”
“아. 그게.”
나는 무심한 얼굴로 회의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는 알고 있었다.
작년 회장단과 올해 회장단이 격돌하는 자리라는 것도,
그래서 내가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도—
자명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고 자부하는
작년 회장단의 자부심을 부수고 싶지 않았다.
억지로 흠을 잡기보다
내 감정을 드러내는 게 옳은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목소리가 떨린 모양이었다.
“아… 저, 저는.”
더듬더듬 나오는 말이
너무 창피했다.
귀가 붉어지는 게 느껴져
고개를 푹 숙이는데,
그때 산적이 말했다.
“여기서 지금 작년 소회를 듣자는 건 아니잖아요.
작년 행사, 선배들만큼 열심히 한 사람들 없었는데
굳이 그런 걸 들어야 해요?
그런 말은
선배들이 없는 자리에서 하는 게 낫죠.”
깔끔하게 정리해 준 산적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작년 행사는,
선배들의 열정만큼이나
좋은 행사들이 많았어요.
물론 아쉬움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걸 굳이 하나하나 집어
‘아쉽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런 점들을 보완하는 데에 머무르기보다는,
이제는 새롭게 만들어 가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그래? 그러면 우리는 잘했다고 생각한단 거네. 고맙다.”
“……”
“그럼 우리는 이제 가볼게.”
내 발언 때문이었을까.
선배들이 우르르 자리를 빠져나가는 동안,
나는 회의에 남아 말하지 않은 것들만 곱씹고 있었다.
‘괜히 말했나? 고문이랍시고, 도움이 하나도 안 된 것 같아. 어떡하지…’
고개를 숙인 채
손에 맺힌 땀을 바지에 문질러 닦아내는데,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우리만 남아 있었다.
우리 기수, 총무를 맡은 여자 후배 한 명과
회장 역할을 자처한 산적.
산적이 묘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왜, 왜 그래?”
“잘했어. 너도, 많이 변했네. 진짜 잘했어.”
“……내가 잘못 말한 거면 어떡해?”
내가 잘못 말해서, 선배들이 가버린 거야?
“그런 걱정하지 마. 방금 전까지 선배들, 확인받으러 온 거잖아.
자기들 잘한 거, 못한 거 들으려고 하다가—
너한테 한 방 맞고 간 거야. 잘 대처했어.”
수수께끼 같은 그 말에, 나는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대체 뭘 잘 대처했다는 건지,
나한테 한방 맞았다는 건 또 뭔지, 모르겠었다.
그때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우리끼리 잘 이끌어 나갈지 걱정돼서 역량을 보려고
그런 질문을 했던 게 당연했을 거였을 테다.
그때의 난, 내가 한방 먹인 것도, 잘 대처했던 것도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였다.
그날 이후,
우리는 자주 회의를 가졌다.
일주일에도 네댓 번,
카페와 동아리방을 오가며
생각들을 나누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알게 된 건,
내가 생각보다 꽤 고지식하다는 것과
산적 역시
그에 못지않다는 사실이었다.
열심히 토론하듯 회의를 하고 나면,
우리는 파김치가 되어
그 자리에 그대로 드러눕곤 했다.
여느 회의가 끝날 무렵이었다.
다들 파김치가 되었겠다 싶어,
술이나 한잔하자고 모인 날.
피곤한 몸에 술을 부어 넣다 보니
나는 금세 술에 절었다.
집에 데려다주겠다며
산적과 함께 길을 나섰고,
휘청거리는 몸 때문에
고시원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나는 쓸모없어. 회의 때마다 느껴.”
“왜 쓸모가 없어. 네 덕분에 회의 방향, 잘 가고 있는데.”
다정하게 대꾸하는 산적이 오늘따라 괜히 얄미웠다.
그래서 그 얼굴에 손을 뻗어 뺨을 늘리며 말했다.
“이이— 맨날 내 말에 반박이나 하면서 말 잘한다 그래.
말로는 이길 수가 없으니 지금이라도 이길래.”
그러자 산적이 내 손을 잡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 얼굴에 손대는 거 싫어하는 거 알잖아. 왜 그래.”
“집에 가기 전에 한 번이라도 이겨먹으려고 그런다.
잘나신 회장님아.”
“그래, 그럼 지금 이겨먹어라.”
잡고 있던 손을 풀어주며 다정하게 말하는 산적이
괜히 뿔이 나서, 나는 날카롭게 대꾸했다.
“너 나한테 뭐 잘못했어?
요새 왜 이렇게 세상 다정해?”
“뭐?”
“잘못한 거 아니고서야—
끄윽—
나한테 이렇게
다정할 리가 없잖아.
너, 나 싫어하잖아.”
“내가 너를… 싫어해?”
“응. 그렇지 않고서야….”
몸을 웅크린 채 발끝만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네가 나한테 잘해줄 리가 없잖아.”
말이 없는 산적을 보며, 나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잘못한 거 말해.
뭘 그렇게 잘못해서 세상 이렇게 다정해?”
말없이 나를 보던 산적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내가 너한테 다정한 게… 이상한 거야?”
“응. 이상한 거지.”
나는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말을 이어갔다.
“너 1학년 때만 해도
나 대가리 꽃밭이라고
싫어하던 사람이었잖아.
그랬던 네가
지금 와서 이렇게 잘해준다는 건—”
잠깐 숨을 고르고,
“뭔가 꿍꿍이가 있거나,
아니면
나한테 크게 잘못한 게
있다는 거지.”
“그래. 내가 너한테 꿍꿍이가 있긴 해.
무슨 꿍꿍인지 알고 싶어?”
“아니— 안 알고 싶어.
싫어한다는 것만
이미 알고 있으니까.
더는 알고 싶지 않아.”
“…… 안 알고 싶어?”
다정한 말로 나를 어떻게 찌를지
고르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나는 그 뒤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집에 가자. 나 추워.”
“내가 너를 꼬박꼬박 집에 데려다주는지, 궁금하지 않아?”
“아, 집에 가자. 나 춥다니까.
나 반바지 입었어. 스타킹 신었어도 추워.”
그날, 산적은 우리 집 문 앞까지
나를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너, 다음엔 꼭 말할 테니까 잘 들어라.”
“뭐를?”
“—내가 너한테 잘해주는 이유.”
“……? 동기니까 그런 거겠지.
용용이나 진진이처럼.
뭔 헛소리야. 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
한숨을 쉬던 산적은 내 머리를 한참이나 쓰다듬다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나는, 산적이 모퉁이를 돌자마자 문을 닫고 주저앉았다.
나한테 잘해주는 이유가
대체 뭘까.
뭐길래—
저렇게까지
말하려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