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은

(feat. 이름붙이기 어려운 감정)

by Rachel

나는 한동안 산적을 피해다녔다.
동아리방에서도, 학과 복도에서도.

마주치지 않으려는 건 아니었는데,
막상 눈이 마주치면
먼저 시선을 거두고 싶어졌다.

그가 말할 것이
무서웠다.


그가 말했던
“나중에 말해줄게.”라는 말이

이상하게도,
이미 들은 말처럼 느껴졌다.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나는 더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동아리방에서 자료를 정리하고 있는데
옆에서 누군가 툭, 말을 던졌다.

“선배, 요즘 왜 이렇게 산적 피해?”

나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뭐가.”

“티 나요. 산적 선배가 선배 볼 때 표정 바뀌는 거 몰라요?”

손에 쥔 펜이 잠깐 멈췄다.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긴. 산적 선배, 선배 너 좋아하잖아요.”

그 말은 이상하게도
충격이 아니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지도 않았다.


다만—

이미 알고 있던 걸
누군가 대신 말해버린 기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괜히 웃었다.

“뭐래. 걔가? 나를?”

후배는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진짜라니까요. 모르는 척하지 마요.”

나는 펜을 다시 움직였다.

“그럴 리 없어. 걔는 나 싫어해.”

그 말은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한 게 아니라
나 자신을 붙들기 위한 말이었다.


산적이 나를 좋아한다는 말보다
그게 더 무서웠다.

좋아한다는 순간,
모든 게 달라질 것 같았다.


우리가 싸워도 괜찮았던 이유도,
괜히 반박하며 웃던 시간도,
모두 다른 이름을 갖게 될 것 같아서.


그래서 나는
끝까지 아니라고 했다.

끝까지,
그 말은 틀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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