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의 출구

의미 있는 연결

by 김혜신

정년 퇴임식에서 그는 동료들의 감사인사를 무덤덤하게 받아들인다.

오랜 세워 몸담은 직장을 떠나며, 그는 공허함을 감출 수 없다.

부인과 함께 할 신형 캠핑카를 준비해 주었지만 마음은 좀처럼 들뜨지 않는다.

평생을 바쳐 일한 직장을 떠나는 그는 마치 속 빈 강정처럼 허무하고 공허한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TV 채널만 이리저리 돌리며 멍하니 시선만 맞추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러운 부인의 뇌졸중 사망이 찾아온다.

그 슬픔도 잠시 그는 부인이 수십 년 전 자신의 친구와 불륜의 관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배신과 충격 속에 그는 집을 나서게 된다.

혼자 캠핑카를 타고 딸의 결혼식을 참석하기 위해 길을 나선 것이다.


하지만 딸은 아버지의 진심 어린 시도에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오랜 시간 아버지의 무관심에 익숙해진 딸은 여전히 거리감을 둔다.

퇴임, 아내의 죽음, 그리고 딸과의 소원한 관계.

그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을 수 없었다.

어디에서 속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한 부부의 아내로부터 그는 뜻밖의 위로를 받는다.

드러내지 않았다고 믿었던 자신의 속마음을 그녀는 조용히 읽어낸다.

평생을 함께 한 아내도 몰랐던 자신의 내면을, 잠시 스친 타인이 알아준 그 순간, 그는 참았던 눈물을 흘린다. 공허했던 마음에 처음으로 온기가 스며든다.


그는 다시 딸을 만나고, 딸의 결정대로 올린 결혼식을 축하한다.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돌아온 집은 낯설다.

삶의 실패자처럼 느껴지고, 누구에게도 진짜 의미 있는 영향을 주지 못한 인생 같아 낙담한다.

그러던 중 후원하고 있는 아프리카 아이에게서 한 장의 그림을 받게 된다.

고아인 그 아이가 자신을 위해 기도하며 그린 그림이었다.

서로의 두 손을 꼭 맞잡고 있는 그림. 그 순간, 그는 울음을 터뜨리게 된다.

잊고 있던 연결의 의미가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


이것은 영화 About Schmidt의 이야기이다.

잔잔하지만 깊은 울림이 있는 영화이다.

우리는 그 영화처럼, 어느 날 문득 모든 역할에서 벗어나 존재의 문턱에 선다.

숨 쉬는 법조차 잊게 될 정도로 막막한 순간을 맞이한다.

늘 다니던 길에서 길을 잃고 익숙한 세상이 낯설게 느껴진다.

어느 순간 가장 가까운 모든 것으로부터 혼자 남겨진 듯한 느낌이 든다.


우리는 늘 현재를 열심히 살아간다.

보이는 상황에서 또는 예측되는 상황에서 자신의 가치를 위해 고군분투한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손에 잡히는 순간 나에게 더 이상 큰 의미가 되지 못한다.

그저 당연한 것이 되어 나와 함께 다시 존재하게 된다.

그렇게 반복되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 공허하게 된다.

그리고 갑자기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들을 보게 된다.

신뢰, 존경, 사랑, 인정, 돌봄, 봉사, 헌신, 위로, 유머, 열정, 자기다움


이 보이지 않는 가치들을 안고는 살았다.

하지만 보이는 유형의 가치를 위해 더 돌진한 삶이었다.

눈앞의 성과와 유익을 좇느라 그것들에 충분히 머물지 못했다.

그래서 때때로 우리는 공허하다.


유형의 가치는 언제가 수명이 다한다.

작은 펜만 하더라도 잉크가 사라지는 순간 더 이상 자신의 쓸모를 잃는다.

잉크가 사라지거나 새로운 펜으로 인해 존재 가치가 없어지는 물건은 늘 삶에서 대체가 된다.

자신을 위한 병풍처럼 잠시 머물다 다시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존재는 다르다.

존재의 가치는 자신과 함께 공존한다.

머물다 사라지지 않는다.

신뢰와 사랑은 그 자체로 함께 존재한다.

그 시선으로 상대를 본다면 헌신과 돌봄이 일어난다.

문득 상대를 향한 그 사랑이 고플 때가 있다.

그러면 느껴진다.

자신에게도 그 사랑과 헌신을 쏟아야 한다는 것을.


외로움은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찾아온다.

혼자서 걸어갈 때 자신이 얼마나 걸을 수 있는지 어떤 마음으로 걸어가는지 알게 된다.

누군가가 아닌 자신이 자신을 살피게 된다.

그러다 만나는 이들과 함께 걸어갈 때 알게 된다.

이 세상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관계없이는 살 수 없는 세상이다.

자신과의 관계만큼 누군가와의 관계가 중요한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이 자신의 손을 먼저 잡고, 그 손이 상대의 손을 잡아주는 것이 인생이다.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것 같은 외로움 속에서는 스스로가 자신의 손을 잡아야 한다.

그렇게 어두운 터널을 걷다 보면 자신처럼 걷고 있는 누군가를 보게 된다.


그의 손을 잡아주게 되는 게 삶이다.




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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