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achel Nov 19. 2021

시작은 가볍게

첫 번째 토이 카메라

*2021년 9월에 작성된 글입니다.


요즘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카메라 어플을 켜서 사진을 찍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파란 하늘에 높게 떠 있는 하얀 구름이 정말 영락없는 가을 하늘이다. 코로나가 퍼지기 전, 날씨가 선선해질 무렵이면 필름 사진을 찍으러 여기저기 돌아다녔기 때문일까.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다가 잊고 있던 나의 필름 카메라가 떠올랐다. 가지고 있던 필름 카메라가 모두 고장 나 지금은 고물 신세가 되었지만.


서랍 안에 자리 잡은, 두 대의 카메라 중 가벼운 플라스틱 토이 카메라.




5년 전 아날로그 감성을 지닌 필름 사진이 다시 유행하면서 주위 친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일회용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댔다. 솔직히 처음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친구들의 사진을 보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결과물을 봤을 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한 분위기의 색감이 일단 마음에 들었고 찍는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느낌이 담겨있었던 게 인상적이었다. 그뿐 아니라 필름 카메라는 사진을 찍고, 필름을 감고 현상을 맡긴 후에나 사진을 확인해 볼 수 있는 일련의 느릿한 과정도 꽤 흥미로웠다. 무엇이든지 쉽고 빠르게 촬영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우거나 원하는 대로 보정할 수 있는 지금 이 시대에 필름 카메라는 고유한 색깔이 존재하는 물건이었다. 그래서 나도 내 카메라로 나만의 것을 담아내고 싶다는 아주 단순한 이유로 곧바로 인터넷에서 단돈 만 원에 첫 필름 카메라를 장만하게 되었다.

작고 귀여운 검은색 다회용 토이 필름 카메라


어렸을 적 소풍 갔을 때 사용해 본 일회용 필름 카메라 이후로 처음이었다. 필름 넣는 법부터 사진 촬영하는 법 그리고 필름을 빼서 현상을 맡기는 일까지 제법 생소하게 느껴졌다. 스마트폰이나 전자기기였다면 내 마음대로 이것저것 만져보면서 사용법을 알아갈 수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필름 카메라는 그럴 수 없지 않은가. 난 필름 카메라를 구매했을 때 동봉된 매뉴얼과 유튜브를 번갈아 보면서 혼자서 사용법을 익혀야 했다.


한남동에서 찍은 봄날의 벚꽃.
파노라마 기능으로 찍어본 풍경.
햇살 좋던 가을날의 마로니에 공원. 내가 좋아하는 장소 중 한 곳.


순조롭게 카메라를 사용하던 중 친구와 강릉 여행을 갔을 때 문제가 생겼다. 처음으로 필름 한 롤을 다 쓰고 새 필름으로 바꿔 넣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때 필름이 잘 끼워졌는지 확인이 필요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몰랐던 것 같다. 카메라를 한참 들고 있다가 결국 다시 카메라 뒤편의 뚜껑을 열었었는데 이게 화근이었다. 빛이 필름 안으로 새어 들어가 한 롤을 채 써보기도 전에 반 이상의 컷을 날려버린 것이다. 물론 이것 역시 여행 다녀온 뒤 현상소에 맡겼을 때나 돼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몇 장의 사진은 건질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대관령 삼양목장 (1)
대관령 삼양목장 (2)
목장에서 내려오던 길목
강릉 봉봉 방앗간. 이름도 공간도 너무 귀여웠던 카페!
※주의. 플래시 없이는 실내 촬영을 하지 마시오


플래시가 없어도 실내에서 충분히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이라는 나의 무지는 카페 안에서 찍은 사진들을 온통 어두운 그림자로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 카메라를 잘못 잡고 찍어 내 손가락 일부가 워터마크처럼 사진 모서리에 보기 싫게 튀어나오듯 찍히는 일도 사실 비일비재했다.



처음에는 사진 촬영이 익숙하지 않아 답답했고 생각보다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좋아서 하는 취미에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나?라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 괴롭기도 했다. 저렴하지 않은 필름을 허무하게 버리는 일도 너무 아까웠다. 하지만 내 마음처럼 잘되지 않는다고 해서 금방 관둘 취미는 아니었다. 사실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이런 실수들을 겪더라도 더 아름다운 풍경을 찍어보고 싶었고 소중한 추억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사진 찍는 게 재미있었다. 재미있는 일은 나에게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고 지금도 그렇다.


어쨌든 이런 자잘한 실수들도 몇 번의 반복 끝에 조금씩 잦아들었다. 필름도 능숙하게 바꿀 수 있게 되었고 플래시 없는 카메라로는 실내에서 촬영하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손가락이 사진에 같이 찍히지 않도록 카메라를 잘 잡는 나만의 팁도 터득했다.


이제 필름만 교체해가면서 즐겁게 사진을 찍을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작은 플라스틱 카메라는 수명이 짧아도 너무 짧았다. 겨우 다섯 번의 롤 만에 고장이 나다니. 첫 필름 카메라였기에 그만큼 나에게 소중한 의미가 있는 물건이었다. 카메라를 떨어뜨린 적도, 험하게 다룬 적도 없었는데 왜 고장이 났을까? ‘만 원짜리 필름 카메라’의 수명은 필름 4개 혹은 5개 정도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단 몇 개의 필름 속에 담긴 추억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다음에는 적당한 가격의 고장 날 위험이 적은, 작동이 잘 되는 필름 카메라를 야겠다고. 시작은 가볍게 했으니, 다음부터는 조금 더 무게감 있는 사진을 찍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