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정해진 일과대로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모처럼 몸도, 마음도 평온한 주말을 맞이했다. 여러모로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별로 없어서 안 그래도 짧아진 봄이 더욱 짧게만 느껴졌지만, 아직 활력 넘치는 봄의 기운을 느낄 수 있어 내심 다행이었다.
이렇게 계절이 한번 바뀔 때마다 나는 방을 뒤엎곤 한다.(여기서 방을 뒤엎는다는 것은 옷 정리를 비롯한 대대적인 청소를 한다는 뜻이다.)날씨가 따뜻해지기 전에 미리 해뒀어야 할 일인데 도통 시간이 나질 않아 주말 하루를 잡아 해치우기로 했다.
일단, 주말에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책상과 침대 주변을 깨끗하게 치웠다. 그리고 오랫동안 공간만 차지하던 낡은 물건들을 정리했다. 옷장을 열어 안 입는 옷들을 과감하게 버렸고 두꺼운 겨울 옷들은 차곡차곡 정리해서 넣었다. 옷장 옆 작은 행거에 얇고 가벼운 여름용 아우터를 걸고 나니 바닥에는 손빨래해야 될 옷들이 한 바구니를 채우고도 남았다.
다시 옷장에 들어갈 겨울 니트, 셔츠 그리고 오랫동안 옷장 안에 있던 여름옷 등등 옷 한 무더기를 보고 있자니 들리는 마음의 소리.
'괜히 옷 정리를 한다 그랬나' '이걸 언제 다 해?'
이런 생각도 잠시 바로 쪼그려 앉아 빨래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하면 할수록 묘하게 기분이 나아지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빛바랜 얼룩들이 지워져 깨끗해진, 한 톤 밝아진 옷을 탁탁 털어 햇빛 잘 드는 곳에 널었더니 몸이 피곤하긴 커녕 오히려 상쾌해졌다. (단순히 해야 할 일을 해치워 후련한 기분과는 다른 느낌으로)
바람에 흔들리는 빨래를 멍하니 보고 있으니 몇 년 전에 관람했던 뮤지컬 <빨래>가 떠올랐다.
난 빨래를 하면서 얼룩 같은 어제를 지우고 먼지 같은 오늘을 털어내고 주름진 내일을 다려요 잘 다려진 내일을 걸치고 오늘을 살아요
<빨래> 中
<빨래>는 서울살이 6년 차 주인공인 나영이 부르는 넘버로,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 나영의 작은 희망을 담담하게 노래하는 넘버이다. 인생을 빨래에 비유한 가사가 인상적이고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힘을 준다.
사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동안 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게 아니었다. 다만 새로운 무언가를 빠르게 받아들이고 또 새로운 것들을 시도해야 하는, 긴장되는 날들의 연속이었을 뿐. 무엇이 자꾸 내 마음을 불편하고 불안하게 만드는지 알고 싶어 최대한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봤다. 나는 하루에도 쓸 수 있는 에너지가 정해져 있는, 완전히 충전된 스마트폰 같은 사람이었던 것이다.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평균 에너지 레벨이 높지 않은 내가 내일 몫의 에너지까지 지금 당장 소모하느라 나도 모르게 더 힘들었던 게 아닐까, 라는생각이 문득 들었다. 틀린 것이 아닌, 서로 다른 것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과정에서 어쩌면 계속 그 누구보다 내가 나 스스로를 괴롭혔던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일상적인 평범한 일을 통해 마음이 이렇게 쉽게 위로받고 풀어지기도 하는 것을 보면 매번 너무 심각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각해하지 않아도 될 일은 유연하게 넘기자.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들여다보자.
내 마음도 손빨래가 필요하다면,그저 넘버 속 가사처럼 잘 다려진 내일을 걸치고 오늘을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