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삶이 나를 내두를 때

by 마케터유정

10월 15일 오후 4시 반부터 퇴근 전까지 사무실에서 일어난


미팅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와 회의록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윽고 N이 내 자리로 오더니 고객 대상 프로그램에 대한 승인을 왜 받지 않았냐고 바로 물었다. 나는 일전에 미팅을 통해서 논의하였고 이메일을 통해 공유된 내용이라 이야기하였다. 이에 N은 나에게 회의실에서 보자고 말했다. 그를 따라 들어가 보니 회의실에는 미팅 중이었던지 다른 직원이 앉아 있었다. N은 왜 승인을 받지 않았는지 다시 물었다. 나는 9월 중순쯤 N, 담당 직원, 나 이렇게 셋이 미팅을 통해서 이 건을 어떻게 진행할지 업무적 논의를 하였고 그 내용을 정리하여 메일로 공유했다는 점을 다시 이야기하였다.


N은 이 프로그램을 예전과는 다르게 진행하였다며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나는 이 건은 성격이 다르다고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였다. 그러자 그는 “그러면 하지 말아야지”라고 소리를 질렀다. N은 계속 화를 내며, “fOOOOOO!”이라고 크게 외친 뒤, “지금 하는 거 다 중단해. 앞으로 하지 마. 결재받고 해.”라고 소리 질렀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지만 알겠다고 대답하였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고 내내 서있던 N은 의자에 앉아서 화면을 바라보며 직원과의 미팅을 이어갔다. 나는 멍하게 앉아 있다가 회의실 문을 열고 나왔다. 근무하던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내가 나오자 모두들 나를 말없이 응시하였다. 마침 회의실 근처 자리에 앉아 계셨던 사장님과 눈이 마주쳤는데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고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마침내 내 자리에 앉았는데 당황스럽고 심장이 두근거려 랩탑 모니터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후 자리에서 무엇을 하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회의실에서 나온 뒤, 나는 깊은 좌절감과 그리고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모욕감을 느꼈다.



외로움 그리고 깨달음


벌써 몇 년 전이다. ‘한참 전’이란 말을 붙이기에도 적당한. 그 일을 떠올리면 외로움이 가장 먼저 가슴을 파고든다. 괴로웠지만 무엇보다 외로웠다. 그랬구나. 이런 일이 있었구나. 마음이 힘들지.라는 따뜻한 한마디가 그리웠다. 회사에서는 나름의 재발방지 조치를 취하였지만 이해당사자들은 어떻게 하면 피해를 입지 않을까 하는 계산 논리와 그런 일이 있었대 수군대는 가십거리가 있었다.


그때 나는 뼛속 깊이 깨달았다. 내 편은 아무도 없구나. 웃을 땐 다 같이 웃는데 슬플 땐 혼자 우는구나. 누가 나를 좀 안아주었으면 하고 그토록 바란 적이 없었다. 쓸쓸하다는 게 미치도록 외롭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그러나 한없이 초라하고 볼품없었던 나를 따뜻하게 받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구도 나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지 못했다.


한참을 외로웠고 서성였다. 얼마 동안 꾸준히 상담을 받았다. 처음 한두 번에는 담당의와 당시의 일들을 얘기했다. 그때마다 나를 함부로 대한 상대방에게 화가 났고 눈물이 났다. 그러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 순간 내가 그에게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내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무엇을 좋아하고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언제 회사 생활을 시작했고 어떤 업무를 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등…….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를 알아가게 되었다. 내가 발견한 나는 썩 괜찮은 사람이었다. 스트레스 받는 환경을 잘 이겨내는 힘이 있었고 일희일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런 내가 마음에 들었다. 나에 대한 공부를 거듭하던 끝에 마침내 스스로에게 위로가 되어 주기로 결심했다.


나를 끌어내리려는
사람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에게 잘했다고
말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을까?


시간이 한참 흐른 지금에 와서도 생각해보면 그냥 넘길 만한 일은 아니었다. 이런 일이 왜 나에게 일어났을까? 간단히 말해 지금의 나는 약하기 때문이다. 지위 여부를 떠나 상대방보다 상대적으로 약했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약하다는 것은 단단해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수준에 닿을 때까지는 약할 수밖에 없다. 무엇이든 새로이 배울 때는 초보 과정에 일정 기간 머물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무엇을 잘못하지 않았음에도 삶은 우리를 이렇게 내두른다. 이런 일을 겪었다고 또다시 경험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다. 동전을 던져 앞면이 나온 뒤 또 앞면이 나올 확률은 뒷면이 나올 확률과 같으니까. 그렇다고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자책하며 괴롭게 여길 것인가. 아니다. 이 시기를 잘 넘기면 과거의 나에서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한편, 상대방은 본인의 행동을 돌아보았을까 하는 물음이 든 적도 있었다. 다음 발췌 글로 내가 얻은 답을 대신하고자 한다. 심하게 모멸감을 느꼈던 어느 날 밤, ‘모멸감을 참는 법’을 검색해 얻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비록 역사로부터 배움을 얻지 못하는 비루한 시대를 산다 하더라도, 끝까지 새겨야 할 역사의 교훈은 어떤 지배계급도 스스로 대오각성하여 기득권을 버린 적은 없다는 것, 오히려 조금이라도 가져갈 이득이 있다면 끝까지 취하려 한다는 것, 그러므로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굴욕을 참으며 버티는 것만으로는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존심을 잊고 “먹고살기” 위한 행위를 온갖 대의명분으로 합리화하는 이들 때문에 더 많은 이들은 “먹고살기” 위해 더 많은 굴욕을 감내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류동민 교수(충남대 경제학과). “먹고사는 것, 자존감과 굴욕감”.「경향신문」. 2015년 9월 15일



작은 불씨가 되다


11월이 되고 바람에 찬 기운이 실리면 슬며시 쓸쓸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경험은 나에게 작은 불씨가 되었다. 내 주변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나는 그 곁에 있어주고 싶다. 내가 그토록 찾았던 것처럼 누군가도 간절히 바라고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세상 모르고 하루 종일 신나게 놀고 있는 우리 아이들에게도 이런 순간이 올 수 있겠지 하는 생각도 든다.


메타(구 페이스북)의 최고운영책임자(COO)였고 Lean In의 저자인 셰릴 샌드버그는 한 강연에서 말했다. 여성들이 상위 리더십 자리에 별로 없는 근본적인 원인은 커리어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 수 자체가 적기 때문이라고.*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교에 진학하고 졸업 후에는 좋은 직장에 들어가지만 결혼 후 출산과 육아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일자리를 떠나는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아이들이 자라고 여유가 생긴 뒤 다시 커리어를 고민하는 대부분의 여성들은 여러 이유로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돌아오더라고 극히 일부 만이 예전의 포지션을 찾는다. 혹은 커리어를 이어가는 여성들도 본인의 의지와는 다르게 자리만 유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당시 강연이 10여 년 전의 것이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최근 자료를 찾아보았다. 2020년에 발간된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주요 기업 최고경영자(CEO)의 남녀 비율이 지난 20년간 3%에서 6%로 증가하였다고 한다.** 그래도 오르는 추세라 웃어야 할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자리 수에 머무르고 있다고 자조해야 할지 모르겠다.


30대를 돌아보며 나에게 점수를 주고픈 부분은 어떤 프로젝트를 완성했고, 어느 자리에 올랐다는 점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나의 가장 큰 성취이다. 그러한 순간들을 버티고 극복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주변에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동료들이 좀 더 많았으면 싶은 바람이 있다.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나의 경험은 소재와 형태만 바뀌어 언제든 누구에게든 또다시 반복될 수 있다. 아니 반복될 것이다.

때문에 이를 극복하며 돌멩이처럼 단단해지고 능력이 붙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시간을 잘 보내는 방법밖에 없다. 성장을 위한 시간이 주어진 이에게 기댈 누군가가 필요하다면, 혹시나 거기 내 몫이 있다면 나는 그를 가만히 안아주고 싶다.


우리 아이들에게 피할 수 없는 그러한 시간이 왔을 때, 차마 엄마인 내게 말을 못 하더라도 이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닿았으면 좋겠다.




* 유튜브. (Dec. 2010). "Why we have too few women leaders" | Sheryl Sandberg : Dec 2010. 온라인 비디오 클립.


** Soyoung Han et al.Women scaling the corporate ladder: Progress steady but slow globally.2020.Peterson Institute for International Economics.Policy brief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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