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고? 누수가 우리 잘못?

참고 살면 호구된다더니

by 마케터유정

이모님과의 전화를 마치고 사무실을 나설 채비를 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기다리는 동안 핸드폰을 꺼냈다. 집주인에게서 장문의 문자가 와있었다. 2층 천장에 누수가 생겼는데 지난주 우리 측에서 부른 업자가 막힌 배수관을 손보려다 잘못 건드린 것 같으니 우리 측에서 해결하라는 내용이었다.


황당했다. 밑도 끝도 없이 무슨.


전후 사정을 자세히 확인해보지도 않고 지레짐작으로 결론을 내리는데 어이가 없었다. 그간의 교류를 통해 집주인의 태도를 알고 있었고 어떻게든 우리의 잘못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도가 대번에 읽혔다. 정말이지 너무한다 싶었다.


아이들 저녁거리를 사서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해 계단 복도를 오르면서 보니 2층 천장 한쪽이 뚫려 있었다. 물을 빼내기 위해 일부러 뜯어 낸 것 같았다. 바닥에는 큰 물통이 하나 놓여 있었고 절반쯤 물이 차 있었다.


부리나케 계단을 올라 집 안으로 들어섰다.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싱크대 쪽 마루가 젖어 있었다. 다용도실은 밖으로 넘치지 않을 만큼 얕게 물이 차 있었다. 막힌 배수관을 통해 물은 힘겹게 천천히 빠지고 있었다. 남편에게 연락해서 상황을 얘기했다. 아무 말이 없었다. 처음부터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역시 이번 건도 남편은 나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모님은 집주인이 들어와서 싱크대와 다용도실을 보고 갔다고 했다. 현장을 보고 갔다며 얼마나 우리를 괴롭힐까 하는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모님을 보내고 평소처럼 아이들을 챙겼다. 아이들은 어떤 상황인지 잘 모른 체 ‘와, 엄마 물 넘치는 거야? 수영장 되는 거야?’ 라며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애들 머리를 한번 쓰다듬었다. 당분간 싱크대를 쓰지 못한다고 일러주었다. 이것저것 챙기느라 평소보다 늦게 불을 껐다. 아이들은 이내 잠이 들었지만 나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쉬 잠이 오지 않았다.


뒤얽힌 실타래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고민이 되었다. 혹시나 우리 잘못으로 결론 나면 어떻게 하지? 아니야, 앞뒤 절차 따져보지도 않고 말하는 게 어딨어? 그러게 진작에 이사 갈 걸. 어디 하소연할 데가 없었다. 말 한마디 없는 남편도 야속하기만 했다. 낯선 공간에 나 혼자 덩그러니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다들 나에게만 손가락질하는 외롭고 고단한 마음이었다. 2주 뒤에 또 출장을 가야 하는데 그때까지 상황이 해결될 수 있을까. 사는 게 참 고단하다 싶었다.


내일도 아침부터 일정이 많으니 조금이라도 잠을 자 두어야겠다 싶었다. 펼쳐놓은 생각들을 그대로 바닥에 늘어놓은 채 억지로 잠을 청했다.


다음날부터 집주인은 기세 등등하게 연락을 취해왔다. 물이 역류해 옆집도 피해를 입었으니 2층 천장과 함께 책임지라는 얘기도 덧붙였다. 이미 우리의 과실로 여기고 말하는 게 불쾌했지만 감정을 내보이며 사태를 불필요하게 키울 필요는 없겠다 싶었다. 일단 왜 배수관이 역류되었는지 팩트를 밝히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바로 휴가를 낼 수 없어서 며칠 뒤에 사람을 부르겠노라 회신했다.


집주인은 언제 사람을 부를 거냐고 다그쳤다. 그들에게 동요되지 않고 차분히 답하려 노력했다. 휴가를 당장 낼 수 없어 회사의 일정을 정리하는 중이며 수일 내로 연락하겠다고 사정을 설명했다. 그동안 우리 집은 세탁기와 싱크대를 쓰지 못했다. 임시방편으로 설거지를 할 때는 그릇에 묻은 음식물을 휴지로 닦은 뒤 화장실로 가서 물로 씻어냈다. 빨래는 인근 코인 세탁소를 이용했다. 불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잡혀 있는 업무 미팅을 옮기고 급한 일을 먼저 처리해서 하루의 여유를 만들었다. 통수를 전문으로 한다는 업체에 연락해 방문일을 잡았다. 전날 저녁 집주인에게 내일 오전에 업체가 방문할 예정이니 그때 보자고 알렸다.




아침이 밝았다. 오늘 하루 벌어질 일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답은 없고 한숨만 절로 나왔다. 그래, 하는 데까지 해보자. 정신은 잃지 말자고 다짐했다.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고 이모님에게는 배수관 업체가 방문해서 집이 복잡하기에 하루 휴가를 드렸다.


드디어 배관기사가 도착했다. 나와 집주인 내외가 지켜보는 가운데 작업이 시작되었다. 우리 집과 옆집을 오가며 싱크대를 살펴보았다. 배수관 한쪽에 수압을 걸어 물대포를 한 두 차례 쏘았다. 막힘의 원인이 음식물 찌꺼기로 보이나 우리 집에서 배출된 것인지 옆집에서 배출되었는지 불분명하다고 했다. 이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배수관 내시경 작업을 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배관기사가 본격적인 통수작업을 시작하려는데 집주인은 이를 말렸다.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해야 하기에 내시경으로 먼저 봐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배수관을 뚫으면 누구 책임인지 밝힐 수 없다고 했다. 뚫지 못하게 말리자 배관업체는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다. 집주인은 본인이 아는 배관업체를 부르겠다고 했다.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점심때가 되어 다른 배관업체가 도착했다. 내시경 작업을 통해 도대체 배수관 어디가 막혔는지 혹 손상된 곳이 있는지 등 상태를 확인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이것이 밝혀지면 자연스레 누구의 책임인지도 알 수 있었다. 배관기사는 우리 집과 옆집을 분주히 오가며 이쪽저쪽으로 내시경 호스를 집어넣었다. 배관기사와 모니터를 살펴보던 집주인이 나를 불렀다.


“자, 여기 소제구에 음식물 찌꺼기랑 기름 덩어리 보이시죠?”
내시경에 연결된 화면은 물이 빠지지 않아 흐릿한 가운데 무언가 기름덩어리 같은 게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바로 이것 때문에 배수관이 막혔고 물이 역류했다는 것이다.


소제구: 보일러나 배수관 따위를 정기적으로 관리하고 청소하기 위해 설치한 점검구. 배수관의 곡부와 분기 장소에 주로 설치함


같은 배수관을 쓰고 있는데 왜 우리 집은 싱크대 일부만 물이 역류했고 옆집은 피해가 더 컸는지 궁금했다. 배관기사에게 까닭을 물어보니 우리 집이 옆집보다 약간 높게 위치했기 때문이라 알려주었다. 소제구가 막혀 원래대로 물이 빠지지 못하자 지대가 더 낮은 옆집으로 물이 넘쳤고 그 바람에 2층까지 물이 새게 된 것이 누수의 전말이었다.


내시경 확인 결과, 집주인이 주장했던 내용과는 달리 이전 업체에 의한 배수관 손상은 없었다. 소제구에 생활 오물이 쌓여 배수관이 막힌 것. 딱 거기까지였다. 내심 제일 염려하고 있던 부분이었는데 우리 측 과실이 없다는 것이 밝혀지자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긴장이 약간 풀리면서 머리가 지근거리는 게 느껴졌다.


집주인은 이제야 원인을 잡았다는 듯 의기양양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이제 배관을 뚫으려는데 그렇게 해드릴까요?”
“네, 저희 이제 싱크대와 세탁기 써야죠. 며칠째 제대로 못살고 있는데요.”


이후 통수작업이 이어졌다. 소제구의 기름 덩어리를 제거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물이 잘 내려갔다. 배수관 업체가 짐을 정리해서 나갔다. 아침부터 우리 집을 드나들던 행렬이 사라지자 한 고개를 넘은 기분이었다. 아이들이 오기 전에 잠깐 쉬고 싶었다. 열려있던 현관문을 닫으려는데 집주인이 계단 복도에서 나를 불렀다.
“저기요.”


집주인은 나에게 보험 얘기를 꺼냈다. 혹시 가입해놓은 일상생활 배상 관련 보험이 있는지 알아보라는 뜻이었다. 그는 오전 내내 의기양양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희가 만일 그런 보험이 있으면 저희가 처리해 드리면 돼요. 저희 것을 확인해보니 그런 보험에 가입되어 있더라고요. 그런데 조건이 거주지여야 한데요. 안타깝게도 저희들은 여기 살지 않아요. 만약 저희가 여기를 주소지로 해두었으면 저희 보험으로 처리하면 되는데 그게 안되니까 한번 찾아보세요.”


이제는 속내를 숨기지 않는구나. 배수관 막힘은 소제구에 생활 오물이 쌓였기 때문이었다. ‘누수는 관리 부주의로 별개의 문제인데 왜 편한 대로 결론 내리는 거지?’ 이제 회유까지 하려 드는구나 싶었다. 별 대답하지 않고 문을 닫았다.


집주인 내외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배수관 등 관련하여 논의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오늘은 그만 마주하고 싶었지만 언제 다시 날짜를 잡을까 싶어 저녁때쯤 집으로 오시라고 했다. 아이들을 친정집에 맡겨두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무슨 얘기를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했다. 정신 차리자. 다 왔어. 거의 끝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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