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마이 갓, 변호사를 어떻게 상대해?

글로 치고받는 살벌한 싸움

by 마케터유정

상대측에서 변호사를 선임했다는 말에 살짝 겁이 났다. 안 그래도 준비서면을 어떻게 써야 할지 머리가 아팠는데 전문가까지 나서다니. 과연 우리가 상대할 수 있을까.


준비서면

당사자가 변론에서 하고자 하는 진술 사항을 기일 전에 예고적으로 기재해 법원에 제출하는 서면을 말합니다 [출처 : 법률용어사전 - 대검찰청]


상대방이 답변서를 제출했다는 송달이 오면 마음이 덜컥했다. 이걸 언제보고 따질까 싶었다. 남편은 준비서면 작성하는 일에 도통 도움 주질 않았다. 회사 일도 해야 하고 애들도 키워야 하고 크고 작은 대소사들을 챙겨가며 어떻게 마음을 잡고 글을 쓸까 고민만 하다 며칠을 그냥 흘려보냈다.


사실 법리에 맞추어 얘기하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외국어를 모르는데 심지어 외국어로 한 편의 글을 쓰라는 기분이었다. 나는 변호사가 아니다. 법리로는 이길 수가 없는 싸움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시간은 흘러만 갔다. 불과 몇 주 뒤가 변론 기일이었다. 재판이 왜 이렇게 더딜까 싶었는데 준비서면이라는 숙제를 마주하고 보니 시간은 속절없이 빠르게 흘렀다.


‘그래, 어차피 글 쓰는 일이잖아.’

최대한 형식에 맞추어 사건을 한눈에 알아보기 쉽게 쓰고자 마음먹었다.


어렵게 구한 준비서면 예시부터 이런저런 문서를 검색해 읽어 보았다. 심지어는 상대방의 답변서 마저 교재였다.

‘아, 이런 식으로 얘기를 풀어나가는구나.’


준비서면을 쓸 때에는 감정이 아닌 팩트를 써야 하며 논리적으로 일관된 내용이 담겨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잘 읽히고 진정성 있으며 읽고 나면 글의 요지를 쉽게 떠올릴 수 있도록 요약된 글을 써야겠다 싶었다.


또한 주장을 할 때는 그에 대한 근거를 보태야 글에 힘이 실렸다. 여러 준비서면과 답변서를 읽어보며 글의 톤 앤 매너는 어떻게 가져가는지, 조사와 접속사는 어떤 표현을 주로 쓰는지를 눈 여겨 살폈다.


내가 이 글을 읽는 판사라고 생각해보았다. 소액 재판의 경우, 판사 한 명이 하루에 100건이 넘는 사건을 본다고 들었다. 어떻게 하면 업무량이 많은 판사가 수월하게 우리의 얘기를 들을 수 있을까 고민되었다.


판사에게 우리의 의견을 잘 전달하려면 무엇보다 사건이 한눈에 그려져야 했다. 판사에게 익숙한 준비서면의 구성에 맞추어 써야 쉽게 읽을 것 같았다. 개요를 잡고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피고 주장에 대한 반박과 우리 측 주장을 우선 정리한 뒤 사건의 경위를 증거와 함께 설명하였다.


다음으로는 판례였다. 밤새 키보드를 두드려가며 우리와 비슷한 사건에서 임대인의 관리 부실을 인정한 경우는 없었는지 찾았다. 우리가 원하는 판례는 역류나 누수로 인한 주택 분쟁 건에서 관리자의 관리 부실을 인정한 사례였다. 주택 분쟁에 관한 사례는 수없이 많았지만 우리가 인용할 수 있는 판례는 쉽게 보이지 않았다.


기사와 판례집을 여러 개를 뒤져 결국 원하는 판례를 찾을 수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눈이 뻑뻑하고 피곤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새벽 3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다음날 출근해야 하기에 나머지는 내일 이어서 쓰기로 했다.




한편 집주인 측은 변호사가 선임되고 나니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우리 측 주장에 대한 반박에 그쳤던 준비서면에서 이러이러한 이유 때문에 임차인의 잘못입니다 라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의 핵심인 누수의 책임이 우리 측에 있다는 것을 보이려고 집주인 측은 연락을 했음에도 계속 물을 사용했기에 우리에게 누수의 책임이 있다는 논리를 폈다. 이는 사실이 아니었기에 증거 또한 있을 리 만무했다.


이에 우리는 누수를 인지한 뒤에는 물 사용을 멈추고 빨래를 외부 세탁소를 이용하는 등 오히려 누수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임차인의 노력이 있었음을 강조했다. 변호인 측에서 주장하는 바와 달리 아침이 아닌 저녁 무렵에 집주인이 우리에게 누수 사실을 알렸음을 보여주는 증거 자료 또한 함께 제출하였다.


변호사가 선임되고 나니 그토록 요청했던 내부공사의 상세 내역이 드디어 서면을 통해 제출되었다. 피고 측은 관련 없는 위층 인테리어 비용을 누수 건에 슬며시 끼워 넣었다.


이래서 우리가 인테리어 견적서 보여달라고 했을 때 그렇게 버티고 보내주지 않았구나. 진짜 눈뜨고 코 베어 가겠네.


판단은 법원의 몫이지만 정해진 법리에 맞춰할 말은 반드시 하겠다. 우리의 억울함을 논리 정연하게 풀어내겠다고 이를 악물었다.




피고의 준비서면을 여러 번 읽으며 맥락을 먼저 파악했다. 주장과 근거를 나누어. 주장에 밑줄 긋고 이에 대한 근거가 제대로 제시되었는지 논리적 비약은 없는지 글을 정리하며 주요 키워드에 밑줄을 그었다.


예전에 제출했던 준비서면과 분쟁조정위원회에서 제기했던 논리들과 비교하면서 주장이 뒤바뀐 것은 없는지 대조하며 꼼꼼히 읽었다.


피고의 논리와 주장이 정리되자 그동안 모아두었던 증거를 하나씩 꺼내어 어디에 반박 근거로 쓰면 좋을지 나열했다.


집주인 측 변호인이 우리를 공격한 점은 우리가 임차인이라고 해서 관리의 의무가 없지 않음을 주장한 부분이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든 판례에는 이사온지 1개월 된 임차인에게도 관리 부실의 책임이 있음을 인정한 내용이었다. 이전 판례가 있다는데 왠지 주눅이 들었다. 한순간에 기운이 쭉 빠졌다. 이렇게 무너져야 하는가 싶었다.


지레짐작하지 말고 내용이 무엇인지 읽어나 보자 싶었다.

판례를 찾아 읽기 시작했다. 또한 법원에서는 사건번호를 토대로 판결서 사본을 신청하면 검토 후 보내주었다.


상대 측에서 든 판례의 요지는 1개월 밖에 안되었다 하더라도 임차인은 임차 건물에서 살고 있다는 것. 때문에 임차인은 화재가 발생하지 않도록 전기시설을 점검하여 화재 발생을 예방해야 한다며 주의 부실의 의무가 있다는 판결이었다.


맞네, 임차인의 잘못을 인정했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다시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잠깐만. 이건 화재잖아.
우린 누수인데?

전기시설은 어쨌든 임차인이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라면, 누수의 원인이었던 배수관은 배수관에 달린 소제구를 열어보야야 내부를 살필 수 있었다. 소제구는 집주인 사무실의 천장을 뜯어야 볼 수 있었다.


'이걸 우리가 어떻게 관리하지? 상식적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는데, 오히려 임대인의 관리가 소홀했다는 뜻 아닌가?'


'그래 맞아, 1개월 밖에 안된 임차인도 관리 부실의 책임이 있다는데 지은 지 만 4년 밖에 안된 신축이라고 책임에서 자유로울까?'


순식간에 여러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생각들이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 메모를 했다. 메모지를 보아가며 하나씩 차곡차곡 반박하기 시작했다.


화재와 달리 배수관은 임차인이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것,

또한 사용기한이 1개월인 경우에도 관리 책임이 있다는 법리는 만 4년 신축건물이라 하여 귀책사유가 없다고 주장하는 피고에게 적용되어 배수관 관리 부실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 주장의 요지였다.




아이들은 늘 함께 자던 엄마가 옆에 없으니 중간중간 잠을 깼다. 울면서 거실로 쪼르르 나온 둘째를 안고 소파에 앉아 깜깜한 거실에서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서류를 읽었다.


서류를 읽고 증거 자료를 정리하다 보니 집주인에게 당한 서러움이 새록새록 기억이 났다. 울컥한 마음에 새벽이 지나도록 피곤한 줄 몰랐지만 하루 만에 끝날 작업량이 아니었다. 아이도 재우고 아침에 출근도 해야 하기에 밤마다 시간을 정해놓고 하기로 했다.


쓴 글을 읽어보고 고치기를 반복하다 준비서면 제출일이 가까이 오자 쫓기듯 서류를 접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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